[중부매일 이병인 기자] 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은 근대시기 이전의 강수량 측정 기구로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진 보물 제561호 '금영 측우기'를 비롯해 조선 시대 측우(測雨) 제도를 계통적으로 증명해주는 2점의 측우대인 보물 제842호 '대구 선화당 측우대'와 보물 제844호 '창덕궁 측우대'를 국보로 지정 하였다.

문화재청은 지난 13일 문화재위원회 동산문화재분과위원회를 개최해 세 점의 과학 유물에 대한 국보 지정 심의를 가결하였으며, 30일 예고 기간 동안 각계의 의견을 수렴한 결과 지정명칭은 위 순서대로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로 최종 결정하였다.

이 3점의 '국보'는 1971년(측우기)과 1985년(측우대) 두 번에 걸쳐 보물로 지정되었으므로 멀게는 근 50년 만에 국보로서 가치가 새롭게 인정받은 것이다.

1442년(세종 24년) 조선에서 강수량 측정을 위해 세계 최초로 측우기와 측우대를 제작한 이후 그 전통이 면면이 이어져왔음을 보여주는 유물들로, 측우기의 경우 1911년 세계 기상학계에서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유일하고 획기적인 발명품으로 이미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국보 제329호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公州 忠淸監營 測雨器)'는 조선 시대 충남 지역 감독관청이었던 공주감영(錦營)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1915년 경 일본인 기상학자 와다 유지(和田雄治, 1859~1918)가 국외로 반출한 뒤 1971년 일본에서 환수되어 서울 기상청이 보관해 오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중앙정부에서 측우기를 제작해 전국의 감영에 보냈기 때문에 여러 점이 만들어졌으리라 예상되지만, 지금은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만 유일하게 알려져 있다.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의 제작시기와 크기 등에 대해서는 중단의 바깥 면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확인된다.

명문에 의하면 이 측우기는 1837년(헌종 3년)에 만들었으며 높이는 1자(尺) 5치(寸), 지름 7치, 무게 11근으로 오늘날 치수로 환산하면 높이 31.9cm, 지름 14.9cm, 무게는 6.2kg에 해당한다.

이는 세종 대에 처음 만들어진 측우기 제도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또한, 바닥면의 명문을 통해 통인(通引), 급창(及唱), 사령(使令)의 직책을 가진 관리들이 관련 업무를 담당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측우기의 명문은 15세기 세종대 강우량 측정제도가 19세기까지 계승되어 원칙에 맞게 꾸준히 유지되었음을 보여준다.

형체 역시 자세히 보면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상, 중, 하단 총 3개의 금속기로 구성되었으며 미세하게 상부가 넓고 하부가 좁아 서로 끼워 맞추도록 하였고 접합부는 대나무 마디처럼 만들어 기형(器形)의 변형을 막고자 했다.

문화재청은 국립문화재연구소와 함께 과학적 조사와 실험을 시행한 결과, 각 접합부는 빗물이 고였을 때 새는 것을 방지하고자 납땜을 해 고정한 흔적이 있고, 높이가 주척(周尺)을 기준으로 1자 5치(1척 5촌)의 근사치에 해당하고 각 단은 약 5치의 크기로 만들어져 몸체 자체가 강수량을 알 수 있는 척도로서의 기능을 했음을 확인하였다.

이는 기존에 빗물의 양을 조선 시대 도량형 표준자인 주척을 사용해 별도로 쟀을 것으로 막연하게 추정해 온 것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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