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박성진 사회부장

얼마 전 서울에 사는 친구와 오랜만에 회포를 풀 기회가 있었다. 저녁 자리에 앉자마나 친구는 대뜸 "청주는 마스크 안 써. 그래도 돼"라며 의아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마치 다른 나라에 온 사람처럼 말이다. 그래서 물었다. "왜. 서울은 어떤데." 돌아온 대답이 기가막혔다. "서울에서는 마스크 안 쓰면 이상한 사람 취급당해. 그 사람이 지나가는 길이 홍해처럼 갈라지거나…"

코로나19가 전국을 강타하면서 서울의 일상을 사진처럼 묘사한 것 뿐인데, 다소 충격적이었다. 친구와 마주했던 3주 전인 그 때는 그랬다. 그런데 지금 청주도 마찬가지다. 지역사회 감염이 현실화되면서 충북 증평, 충주, 음성 등 전국이 서울의 '마스크 행렬'을 복사한 듯 똑같다. 승강기 안에서 혹여 기침이라도 하면 여지없이 탄식이 흘러나온다. 휴대전화는 연신 경고성 메시지 알림음을 낸다.

코로나19 관련 정보를 퍼나르는 지인들의 걱정어린 마음이 잠시라도 손을 가만두지 않는다. 코로나19를 피하는 의학정보, 지역사회 확진자 관련 속보, 주변에서 들은 미확인 소문 등이 넘쳐난다. 가짜뉴스도 다수 끼어있다. 모임이나 소소한 약속도 깨지기 일쑤다.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는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조언한다. 감염은 결국 사람이 전파한다. 특히 사람들 간 대화 속에서 반드시 발생하는 비말(침방울)이 전파자 역할을 한다. 다수가 모이는 곳을 피하라는 것은 다시 말해 사람을 경계하라는 것이다. 극단적으로는 사람을 만나지 말라는 의미이다. 어찌보면 참 무서운 예방법이다. 감염 확산을 위한 가장 완벽한 방어수단이지만 스스로 고립을 선택해야 한다는 측면에서는 슬픈 조치다.

사람이 사람을 피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나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라는 생각이 가장 클 것이다. 만남을 꺼린다는 것은 상대방이 위험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대목이다. 더불어 사는 이웃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절체절명의 감염병 창궐 시국에서는 당연한 행동이지만 사람을 경계해야 하는 알고리즘은 올바르게 작동해야 한다. 그저 사람들을 '잠재적 보균자'라고 여기면 파장은 더 커진다. 부지불식간에 배타적이고 공격적으로 변할 수 있다. 코로나19 공포가 종식되더라도 혹여하는 불안한 마음이 앞설 수 있다. 의심은 무섭다. 나도 모르게 성향을 바꾼다. 일상에서는 주변인의 기침이 그 사람의 건강을 걱정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지만 지금의 재채기는 그 사람을 경계하는 의심의 눈초리가 된다. '사람이 참 간사하다'고들 말한다. 청주에서 코로나19가 발현되지 않았을 때만 해도 대범한 듯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다가 지금은 마스크를 몸에서 떼지 않는다.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은 타인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게 아니라 내가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다.

박성진 사회부장
박성진 사회부장

기침을 할 때 손수건이나 옷소매 등으로 입·코를 막는 것은 내가 아닌 남을 위한 행동이다. 대면접촉을 꺼리다보니 전화, SNS(사회관계망서비스), 문자메시지 등을 이용한 간접 대화가 일상처럼 박제되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보호해주는 것이 덕목이다. 요즘은 이런 미덕이 더욱 절실하다. 마스크를 쓴 가운데 눈웃음으로 서로에게 인사를 전하는 소소한 정을 잊지 말자. 서로가 서로를 아끼지만 잠시만 눈에서 멀어지자. 코로나19 공포로 잠시 서로를 경계하지만 우리는 꼭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자. '의심만 빼고' 잠시 만남을 접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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