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문약(文弱)한 나라'였다. 그러나 유일하게 강한 조선의 꿈을 꾸었고 후대에 자존심을 세워준 책이 하나 있다. 바로 정조의 명으로 1790년(정조 14년)에 편찬한 훈련용 병서인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다. 이 책은 동북아 무예인 한, 중, 일의 무예를 집성한 것으로 무예를 그림과 해설을 넣어 종합본으로 만든 것이다. 이 책은 북한이 주도하여 2017년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북한은 김일성대학을 중심으로 수년간 치밀하게 준비했다. 반면에 우리는 무예단체들이 지속적으로 정부에 건의하고 2008년 '전통무예진흥법'제정 이후에도 전통무예진흥기본계획수립에 포함시켜줄 것을 지속적으로 요청했지만 정부의 무관심으로 접근도 하지 못하고 북한이 단독으로 등재하게 만든 빼앗긴 무예서이기도 하다.

무예도보통지 영인본.
무예도보통지 영인본.

세계최고의 무예종합서

무예도보통지는 국가사업인 만큼 당시 규장각의 검서관인 실학자 이덕무와 박제가, 그리고 장용영 소속의 군장교이자 무인인 백동수 등이 참여하여 편찬했다. 이 책은 한글 해석본인 언해본 1권과 한문본 4권으로 총 5권으로 구성돼 있다. 원래는 한문본 5권이었으나, 1권의 언해본이 포함돼 보다 쉽게 배울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정조의 열정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완성된 무예도보통지는 4권의 한문본에 1권의 언해본(한글 해석본)으로 구성된다. 1권에는 주로 찌르는 무기인 장창(長槍), 죽장창(竹長槍), 기창(旗槍), 당파, 기창(騎槍), 낭선(狼先)이 있고, 2권에는 베는 무기인 쌍수도(雙手刀), 예도(銳刀), 왜검(倭劍), 교전(交戰)이 있으며, 3권에도 베는 무기 종류인 제독검(提督劍), 본국검(本國劍), 쌍검(雙劍), 마상쌍검(馬上雙劍), 월도(月刀), 마상월도(馬上月刀), 협도(挾刀), 등패(藤牌)가 포함돼 있다. 그리고 4권에는 치는 무기인 권법(拳法), 곤방(棍棒), 편곤(鞭棍), 마상편곤(馬上鞭棍), 격구(擊毬), 마상재(馬上才)로 구성돼 있다.

또 하나의 재밌는 것은 도식을 통해 무기의 제도나 형태를 그림으로 표현했고, 설을 통해 해당 무기나 무예에 대해 역사적 사례 등을 설명하면서 병기의 제도와 기원, 제작법, 재료, 관련 인물들까지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책의 기본인 '무예제보'와 비교해 '무예제보'를 인용한 무예에 대해서는 '원(原)'으로 표시하고 그대로 전재했으며, 새롭게 증보된 것에 대해서는 '증(增)'으로, 또한 특별한 논증이나 편찬자의 견해에 대해서는 '안(案)'으로 표기하여 이해를 도왔다. 무엇보다 '증'에 있어서는 아직은 세상에 그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는 사도세자가 '무예신보(武藝新譜)'를 편찬할 때 증보한 내용일 것이라는 것이 학계의 주장이다. 특히 무예서를 '경국대전(經國大典)'이나 '대전회통(大典會通)'과 같이 서술방식을 구성하고 있어 세계 최고의 무예서로 평가받고 있다.

무예도보통지의 서문에 나온 정조의 친필
무예도보통지의 서문에 나온 정조의 친필

본국검은 신라검이 아닌 새로 만든 신검(新劍)이다

무예도보통지에서 순수 우리 무예를 찾기란 쉽지 않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던 활쏘기가 빠진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부분이 외래에서 유입해 재정립시킨 무예들이다. 권법의 경우에는 송태조 장권 32세를 기초로해서 만든 것이고, 곤방은 소림곤법천종에서 차용했으며, 장창은 양가육합팔모창법인 양가창법이다. 그리고 예도는 '조선세법'이라고 하여 중국의 '무비지'에 있던 검술을 다시 가져온 것고, 쌍수도(장도)는 왜구의 공격에 영향을 받아 중국의 장도(묘도)술을 가져온 것이며, 왜검은 숙종때 김체건이 일본에 가서 배워온 일본의 유파검술을 기초로 창안한 것이다. 이외에도 제독검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에 파견돼 배어온 명나라 제독 이여송의 검술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본국검에 대해서는 신라 황창랑을 이야기 하며 순수 우리 검술로 평가 받고 있다. 그러나 본국검에 '신검(新劍)'이라고 명시한 것에 대해 국내 무예계에서는 다양한 해석을 하고 있다.

허건식 체육학 박사·WMC기획경영부 부장
허건식 체육학 박사·WMC기획경영부 부장

대부분 '신라검'으로 보고 있고, 역사도 신라 화랑 황창랑으로 역사를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당시 우리의 검술이 뚜렷하게 없는 상태에서 신라 황창랑의 이야기를 언급해 당시 백동수 등이 새로 만든(新) 검술로 보고 있다. 그 이유는 순수 우리의 검술이라면 무예도보통지의 발간 전후의 무과시험에서 본국검을 선택한 응시자들이 많았어야 함에도 그 수는 예도나 제독검에 비해 형편없이 적거나 없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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