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E] 주민우 옥천 동이초등학교 교사

 

충남 금산군 추부면 요광리 은행나무
충남 금산군 추부면 요광리 은행나무

"선생님, 은행나무는 불에 잘 타지 않는다고 하는데 진짜인가요?"

아이들 앞에서는 항상 만물박사이고 싶지만 이번엔 지식 밑천이 드러나게 생겼다. 급한 마음에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아보니 원자폭탄 투하 당시 불바다가 된 히로시마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식물이 바로 은행나무란다. 이쯤되니 아이들보다 내가 더 학구열에 불타오른다.

"얘들아, 그럼 우리 같이 은행나무가 진짜 불에 잘 타는지 안타는지 한 번 알아볼까?"

그렇게 첩첩산중 시골학교 아이들과 햇병아리 선생님의 과학전람회 도전기가 시작됐다.

은행나무가 정말 불에 강한지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난데없는 불장난에 들뜬 꼬마 과학자들은 충북 옥천 이원 묘목시장으로 달려가 여러 조건을 통일한 5종의 나무에 불을 붙여보았다. 반복해서 실험해보니 은행나무에 불이 붙는데 걸리는 시간은 다른 나무들보다 두 세배 더 길었다. 도대체 은행나무는 왜 불에 강할까?

우선 은행나무는 수분이 많다. 불을 갖다 대면 요란스럽게 타버리는 자작나무나 소나무와 달리 은행나무는 나무 표면 여기저기서 물방울이 올라와 불에 맞선다. 목재 수분 측정기로 측정해보면 다른 나무들보다 10% 정도 수분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두꺼운 수피에 그 비밀이 있다. 나무의 횡단면은 수피와 목질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특이하게도 은행나무만 수피 부분이 다시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바깥쪽 수피는 두껍게 발달하며 갈라지는 코르크질, 안쪽 수피는 하얀색 섬유 다발의 부드러운 재질이다. 이 안쪽 수피는 만졌을 때 물이 손으로 흘러내릴 만큼 수분이 많다. 뜨거운 핫플레이트에 여러 나무들을 올려놓고 열화상카메라로 촬영해보면 열이 순식간에 전도되는 다른 나무들과 달리 은행나무만이 안쪽 수피 부분에서 열을 차단한다. 이 조직은 두꺼운 코르크층에게 보호받으며 나무가 빨아들인 수분을 저장해 열 전도를 막는 탁월한 역할을 한다.

아이들은 은행나무의 활용 방안을 찾기 위해 2005년 일어난 낙산사 산불에 주목했다.

낙산사 근처의 빽빽한 소나무 숲이 산불을 부채질해 천년고찰을 뜬눈으로 잃은 사건이다. 과거 우리나라는 전쟁으로 황폐화된 산림 복구를 위해 번식이 빠른 소나무 위주로 녹화 사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소나무의 송진은 인화성 물질이기 때문에 우리 산림은 불에 매우 취약할 수밖에 없다. 아이들은 전국과학전람회 무대에서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은행나무 방화림 조성을 제안했다. 산 군데군데에 산불 저지선을 만들자는 것이다. 산불이 발생했을 때 산불 진압 역량을 모을 시간은 벌기 위함이었다.

2019년 4월, 국가재난사태 선포로 이어진 강원도 산불 사건을 보며 우리의 연구와 고민이 헛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당시 산불은 시내를 훑고 해안까지 번져 막대한 피해를 불러왔는데, 은행나무와 참나무로 둘러싸인 민가는 감쪽같이 화마를 피해갔다는 뉴스가 여럿 보도됐기 때문이다. 이에 정부에서도 방화림 조성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 동안 큰 산불이 날 때마다 방화림을 조성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산림청에서 실무에 착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란다.

주민우 옥천 동이초등학교 교사
주민우 옥천 동이초등학교 교사

이쯤되니 아이들 역시 근거 있는 자신감이 넘친다. 뭔가 가치있는 연구를 한 것 같단다. 경쟁팀 도시 아이들의 멋들어진 발표 실력에 움츠러들었던 모습은 이제 없다. 아이들이 더 큰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교사로서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있을까. 덕분에 만물박사인 척 하고 싶은 선생님은 오늘도 신기한 과학 이야기를 찾아 열심히 스마트폰을 뒤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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