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모임득 수필가

천년고찰 청도 운문사 가는 길은 그리움과 설렘의 시간이다.

같은 학교를 졸업하고 은행에서 같이 근무하던 후배가 스님이 되었다. 스님을 만나러 가는 길, 동료들이 30여년 만에 만났다. 보지 않은 긴 세월이 어색할 만도 한데 시간을 거슬러 우린 모두 이십대 초반으로 돌아갔다.

스님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아련하고 눈물이 핑 돈다. 수행자의 길을 가고자 출가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머리 깎고 옷 바꿔 입는다고 스님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눈물겹다.

공양간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스님이 왔다. 세월이 비켜간 만큼 맑은 모습으로 인사를 하는 고봉스님. 머리 깎고 스님복장을 한 모습이 생경스럽기도 했지만 참 오랜만에 보는 반가움을 눈물 한 모금, 비빔밥 한 숟가락으로 애써 눌렀다.

대웅보전에는 비로자나불이 홀로 법당을 지키고 있다. 불단 서쪽의 천장 아래에는 반야용선이 있다. 중생을 태워 피안의 세계로 인도하는 배다. 아랫부분에는 작은 종들이 일렬로 달려있고, 종 아래로 대롱대롱 줄에 매달려있는 앙증스러운 나무 조각상이 있다. 악착동자이다. 극락정토로 향하는 반야용선이 출발할 때 한발 늦은 보살에게 사공이 밧줄을 던져 주었다. 항해 내내 보살은 악착같이 매달려 끝끝내 정토에 닿았다. 푸른색 머리에 주황색 띠를 두른 초록상의, 하얀 바지를 입고 외줄에 매달린 보살이 왠지 안쓰럽다. 나는 저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무엇을 한 적이 있었던가.

고봉스님이 악착동자에 대해 설명한다. 원래는 청의동자(靑衣童子)라고 해야 된다는 사람도 있는데 스님들은 악착동자라고 한다고.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서 악착같이 올라가고, 수행을 위해서는 악착같이 참아야 한다. 반야용선을 타고 간다고 보통 하는데 현실적인 장소를 의미하는 극락도 있지만 내가 깨닫는 부처님 그 자체가 극락이듯, 그 깨달음을 다다르기 위해서 나태하지 말고 열심히 올라가라는 의미로 해석한다고.

스님 눈가가 촉촉이 젖은 듯 보인다. 속세의 모든 인연 저버리고 마음의 눈물을 얼마나 흘렸을 것이며, 많은 번뇌로 고민하였을까. 특히 부모님을 생각하면 운문사 입구 소나무숲길을 지나온 솔 내음만 맡아도 사무치게 그리웠으리라.

학인시절에는 자세부터 교정을 했다고 한다. 일찍 일어나서 예불과 공부, 후원일 등으로 육체도 힘들지만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바짝 긴장해야 한단다. 정신없는 시간에도 마음의 고통과 번뇌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을 터. 악착동자 악착의 의미는 중생보다도 스님이 되기 위해 정진하는 이들의 깨달음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면 반야용선은 물리적인 배가 아니라 마음속 깨달음의 배다.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지 않던가. 시바세계의 고해(苦海)를 건너 피안의 세계로 가는 배다.

모임득 수필가
모임득 수필가

비구니 스님들의 정원을 거닐며 고봉스님은 하심을 배워야 하는데 잘 안될 때가 있다고 하였다. 괴로움의 근본도 마음에서 오는 것. 나를 내세우니 마음이 일어날 때가 있는데, 생로병사에 관련된 일이라면 얼마나 더 할까 싶다고. 그래서 중생인 우리들이 더 존경스럽고 대단하단다. 중생의 삶이 부처고 선지식이라고.

스님 친견 후 죽비로 한 대 맞은 듯 깨달았다. 완벽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고 마음을 낮추도록 노력해야겠다. 밥벌이에서 오는 갈등 좀 더 비우고 악착같은 욕심 내려놓고 초심으로 돌아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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