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이난영 수필가

수선화
수선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3월은 왠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고, 무언가 기쁜 일이 있을 것만 같아 설레기만 했었다. 올해는 코로나19 확산으로 비상시국이다. 평생교육이나 각종 행사가 중지되어 외출을 자제하다 보니 대형마트는 물론 재래시장도 텅텅 비었다. 우리 카페도 고객의 안전을 위해 잠시 휴업했다.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와는 달리 온실 안의 매화는 그윽한 향기를 뿜어내고, 실내에 들여놓았던 수선화가 활짝 피어 잠시 시름을 덜어준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시골집 뜨락은 작아도 봄부터 가을까지 꽃이 피어있어 오감을 만족시켰다. 야생화가 속살거리고 정감이 넘치는 꽃 뜨락이 놀이터였기 때문일까. 지금도 꽃이 없으면 가슴 한구석이 휑뎅그렁하다.

인간은 누구나 다 행복한 삶을 원한다. 내가 꿈꾸는 삶은 한적한 시골, 작은 정원이 있는 집에서 꽃을 기르며 사는 것이었다. 세상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듯 꿈을 실현하기 직전에 다리를 다쳐 수포가 되었다.

몇 년 거동을 못 해 움츠러들었던 몸과 마음이 제자리로 돌아오기까지 참으로 많은 세월이 흘렀다. 절망과 좌절의 늪에서 허우적댈 때 마음을 다독여주는 사랑하는 가족과 형제자매들이 있어 슬기롭게 극복했다.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니 자연과 함께하고 싶은 욕망이 꿈틀댔다. 농사도 지으며 꽃을 기르는 인생 이모작을 실행하기로 했다. 헌 집을 카페로 리모델링하여 딸이 운영하고, 정원은 우리 내외가 관리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아기자기한 정원에서 삶에 촉촉한 향기를 주는 꽃을 기르며, 독서와 글을 쓰는 안빈낙도의 삶은 생각만으로 설렜다.

그리 크지는 않으나 감나무, 블루베리, 앵두나무를 비롯한 유실수와 미선나무, 라일락, 배롱나무, 덩굴장미 등으로 사계절 꽃을 볼 수 있게 골고루 심었다. 앵초, 수선화, 금낭화, 뻐꾹나리 등 야생화를 비롯해 오이, 상추, 호박, 토마토, 고추 등 채소도 파종했다. 한적한 들길을 지나가다가도 함함히 피어있는 들꽃을 보고 행복해했는데 내가 직접 가꾸고 보살피니 사랑스러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영춘화
영춘화

고운 하늘빛 아래 봄을 알리는 영춘화가 실바람에 비단 물결을 이루며 남실남실 춤을 추고, 샛바람에 한파를 이겨낸 나무들이 기지개를 켠다. 겨우내 다져진 지표면을 뚫고 나오는 크로커스, 수선화, 튤립을 보며 자연의 위대함을 느낀다.

봄이면 벌들의 향연과 새들의 합창이 귀를 간질이고, 밤이면 달빛도 조용히 내려와 머물다 간다. 사계절 꽃향기에 취할 수 있는 데다 여름엔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감상 할 수도 있다. 운수 좋은 날은 창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오색찬란한 무지개도 만난다.

어머니 품속처럼 포근하고 아늑한 뜨락에 가득 피어 있는 예쁜 꽃들과 눈 맞춤하다 보면 하루해가 짧다. 나무와 꽃을 기르면서 계절의 변화에 어울리도록 몸단장하는 부지런함과 모든 것을 내어주는 고마움 등 많은 것을 배운다.

하루가 다르게 녹음의 깊이를 더해가는 정원을 서성이다 보면 머리까지 맑아진다. 심호흡하며 신선한 공기를 들어 마신다. 상쾌함이 폐부 깊숙이 파고든다. 찬란한 봄의 향연이 고단했던 마음을 일으켜 세운다.

농작물을 키우고 꽃을 가꾸며 닫혔던 마음의 빗장을 열었다. 틈틈이 글을 쓰며 위안과 휴식을 얻었다. 힘듦을 기쁨으로 승화시키니 삶이 윤택해졌다. 만약 인생 이모작을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내 삶이 지금처럼 여유롭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할 일이 있으니 퇴직 후 건조한 삶에 초록빛 생기가 스며든다. 나태해졌던 몸과 마음이 조여지는 것이 1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다. 잡초 뽑는 등 생경한 일이라 몸은 고달픈데도 마음은 풍요롭다.

병이라는 잔미운 친구가 따라붙어도 꽃을 보면서 삶의 찌꺼기를 걸러내듯 마음을 정화하며 허허로운 심신을 달랜다. 얼마 전에도 머리에 결절이 생겨 또 조직검사를 했다. 착잡한 내 마음을 아는지 부겐빌레아, 난타나, 세이지가 고운 미소 짓고, 동백꽃이 만개하여 시린 가슴을 어루만진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잠시 휴업했던 카페 문을 열었다. 단골들이 더 반긴다. 어떤 분은 힘들 때 정원에 앉아 이바구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었는데 휴업하니 아쉬웠다며 쌍수로 환영한다. 알게 모르게 행복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는 생각에 미소가 번진다.

백화등
백화등

아직은 바깥바람이 쌀랑하나 손바닥만 한 화단을 하나 더 만들어 할미꽃, 자란, 목수국과 함께 행복도 심었다. 꽃이 예쁘다면서 사진을 찍기도 하고 흠흠 향기를 맡아보는 손님들이 있어 보람을 느낀다.

희망과 꽃향기로 물들어야 할 봄이 코로나19와 사투를 벌이고 있어 안타깝다. 어려움 속에서도 환자들과 이들을 돌보는 의료진의 고단함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다행히 미미하지만, 완치자가 늘고 있으니 희망이 보인다.

이난영 수필가
이난영 수필가

백화등이 만개하여 향기를 뿜어내고 진달래가 꽃봉오리를 밀어 올리고 있다. 시국이 어렵고 혼란스러워도 어김없이 봄은 오듯 "이 또한 지나가리니"란 명구를 되새겨 본다. 코로나가 아무리 기승을 부려도 위기 극복에 모든 국민이 뜻을 합치고 지혜를 모은다면 희망의 봄은 꼭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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