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종완 위로&소통연구소

지난 주 직장에 다니는 딸아이 이사가 있어 서울에 다녀왔다. 딸아이가 혼자 이삿짐을 싸는 게 처음이라 제대로 쌌을지 걱정이 됐다. 플라스틱 박스에 꼼꼼하게 싸여진 이삿짐을 풀면서 기우였음을 알아차렸다. 그릇과 컵은 신문지로 싸서 깨지는 것을 막았고, 옷은 종류별로 세심하게 분류해 쌌다. 또 박스마다 포스트잇으로 내용물을 표기해 두어 정리하기가 수월했다.

딸아이가 어리다고만 생각했었는데 꼼꼼하게 싼 이삿짐을 보면서 훌쩍 성장한 딸의 모습에 놀랍고 대견했다. 더 놀랐던 것은 딸아이의 꼼꼼한 이삿짐 싸기가 아내를 빼닮아서다. 아내는 완벽주의 성향 탓에 모든 일에 대충하는 법이 없다. 우리는 살면서 두 번 이사를 했는데 이삿짐을 싸는 모습을 딸아이가 눈여겨봤던 모양이다. 자식은 부모가 믿어주고 기다려주는 시간 속에 성장하는 존재인 듯하다.

아내의 꼼꼼한 일처리는 장모님을 닮았다. 지난 해 초여름 처가에 들러 떼어놓은 방충망을 설치하며 알게 된 일이다. 팔십이 넘으신 장모님은 방충망을 말끔하게 청소한 뒤 비닐로 싸고 끈으로 동여매 보관하셨다. 지난 해 초겨울에는 배추가 서리 맞을까 염려가 되셨던지 한 포기씩 자란 두 개의 화분에 지주목을 설치하여 비닐을 씌워 놓으셨다. 장모님의 빈틈없는 꼼꼼한 일처리에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매사 꼼꼼하게 일처리 하는 딸아이는 아내를 빼닮았고, 아내는 장모님을 빼닮았다. 심리학자들은 '부모는 자식의 신이다'라고 말한다. 자식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부모의 삶과 언행을 보고 듣는 것으로 습득하고 성장한다. 부모의 삶과 언행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대물림된다. 자식은 부모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인 듯싶다. 부모의 영향력은 자식에게 절대적이다.

나는 오른쪽 새끼손가락으로 머리를 긁는 짓을 무의식중에 간혹 하는데 부친을 빼닮았다. 이런 행동을 보면 아내는 질색한다. 몸속에 모친의 영혼이 들어 있는 느낌이 들만큼 모친의 말투와 억양을 빼닮은 지인을 볼 때면 섬뜩하다. 내 주변에 화가 났을 때 상대방을 쳐다보는 눈초리와 거실에 앉아있는 자세가 부친을 닮았다는 이도 있다.

장모님은 평생 순대를 먹어본 적이 없다고 하신다. 그 식성을 큰 처제가 닮았다. 자식은 부모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성격과 사고방식까지도 닮는다. 어떤 이는 저축보다 쓰는 것을 우선시하는 부모의 씀씀이 패턴을 닮기도 한다. 삶의 문제가 생겼을 때 적극적인 해결보다 회피하는 성향과 옹고집까지 대물림되기도 한다.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기'에서 "뚜껑 열린 병을 물속에 박으면 쉽게 물이 차듯이, 감수성이 풍부하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쉽게 자신을 충실하게 만들 수 있다"라고 썼다. 이삿짐을 풀면서 딸아이가 '뚜껑 열린 병'처럼 우리 부부의 언행과 일거수일투족을 받아들이며 성장해왔음을 확인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뚜껑 닫힌 병'이 아니라 '뚜껑 열린 병'과 같다. 악덕과 악행의 대물림을 끊게 해주는 거름종이는 의식적인 삶이다.

이종완 농협안성교육원 교수
이종완 위로&소통연구소

사람은 나아지는 삶에서 행복감을 느끼는 존재다. 딸아이는 비좁은 원룸에서 쾌적한 오피스텔로 옮긴 것만으로도 호텔에서 생활하는 느낌이 든다며 좋아한다. 이삿짐을 정리한 후 딸아이가 "이사 온 집이 넓어서 살 빠질 것 같아요"라고 만족해한다. 딸아이의 무한 긍정성이 아내를 빼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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