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영옥 수필가

겨울이라는 말이 무색하리만치 포근한 날이 계속 되는 2월 중순, 이대로 봄을 맞이하나 했더니 웬걸 갑자기 영하로 내려간 냉기가 살 속을 파고든다. 요 며칠 유난히 따뜻했던 터라 체감온도는 더욱 낮은 듯하다. 게다가 눈까지 펄펄 내린다. 이대로는 봄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싶지 않은 겨울의 심보이리라. 백번 이해한다. 나도 그렇게 맹숭하게 겨울을 보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올겨울은 여느 해와 다르게 유난히 포근하긴 했다. 겨울은 겨울답게 코끝이 시리도록 추워야하는데 지금이라도 영하의 온도가 맘에 든다. 게다가 눈까지 내려준다니…, 온몸으로 겨울을 느끼기 위해 집을 나섰다. 이럴 땐 걷는 것이 제격이다. 특히 겨울을 보내고 봄맞이를 하고 있을 호암지가 궁금하다. 호암지를 걷기로 한다.

호암지는 충주 지역 달천 평야의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준공된 저수지였지만 지금은 생태공원과 잘 정비된 산책로가 일품인 곳이다. 호암지의 초입에 들어서면 여러 대의 시화게시대가 있다. 볼에 떨어지는 눈발의 차가움을 느끼며 한 편의 시를 음미해 보는 일도 오늘따라 새롭다. 아직 얼음이 덜 풀려 군데군데 남아있는 겨울의 흔적 속에 물오리떼들이 힘차게 자맥질을 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입구에서 십분 쯤 걷다보면 '피안역'이라 카페 하나가 있다. 무인카페로서 호암지를 산책하는 사람 누구나 이용할 수 있고 가볍게 차 한 잔을 마실 수 있도록 조촐한 준비가 되어있다. 찻값은 자율로 자선함이라는 통 속에 넣으면 된다. 그리고 자유롭게 자신의 이야기를 쓸 수 있도록 노트가 준비되어 있다. 호암지를 산책할 때면 빠지지 않고 들르는 곳이다. 즉석커피 한 봉지를 타서 마시며 다른 사람들이 써놓은 사연들과 또다른 누군가가 달아놓은 댓글을 읽어보는 일 또한 호암지 산책의 재미다.

모르는 사람들끼리의 소통을 생각하며 이 집 주인장 김시인을 생각한다. 사시사철 맨발로 통기타를 둘러메고 버스킹으로 모은 돈과 자신의 연금의 일부를 떼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는, 공무원으로 퇴직한 괴짜시인이다. 장학금 전달 방식 또한 상식을 벗어난다. 보통, 공부는 잘 하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운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지만 이 시인은 그렇지 않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기는 하는데 성적은 꼴등에서부터 순서를 센다. 공부는 비록 못하지만 성실하게 학교생활을 하는 착한 학생에게 장학금을 수여한다.

잠시 동안 머무는 피안의 세계는 시끄럽고 복잡한 세상을 잠시라도 잊게 해주는 묘한 장소이다. 이름덕인가보다. 입안에 맴도는 믹스 커피의 달달함 속에 비상식의 아름다움을 생각하며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 걷기를 이어간다. 걸으며 생각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팔자라는 걸 가지고 태어난다고 한다. 이런 자기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몇 가지 처방전이 있다고 하는데 그 중 명상(瞑想), 명당(明堂) 두 가지가 내 마음을 끈다.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는 명상, 좋은 장소인 명당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하니 명상과 명당을 한꺼번에 해결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걷기 명상이다.

마지막 가는 겨울에게 끝까지 넉넉한 자리를 내어주고 있는 호암지 쯤 이면 명당으로서, 호숫가를 따라 걷다보면 무겁고 복잡했던 생각들이 홀연히 가벼워진다.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에 따로 시간을 내어 명상을 한다는 일이 불가능 할 때 좋은 장소에서의 걷기 명상은 육체의 건강까지 더 해 주는 일석 삼조쯤의 훌륭한 운명 개조법이다.

김영옥 수필가
김영옥 수필가

버들개지가 눈을 뜨고 있는 호암지에서 나는 이제 겨울을 온전히 보내고 오직 기쁘고 달뜬 마음으로 봄을 맞을 준비를 한다. 이제 곧 터질 산수유 꽃망울과 함께 호암지의 물빛은 나의 운명을 바꾸어줄 걷기 명상을 계속 재촉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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