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청주 수동에 시청의 주차장으로 쓰이는 공터가 있다. 내가 태어나 살던 집이 있던 곳이다. 삼년 전에 철거된 그 집이 가끔 그리울 때가 있다.

그림 그리기는 나로선 생각도 못한 것이다. 이년 전쯤에 우연히 시작했는데 실력은 볼품 없어도 취미가 되어 있다. 나만의 세계를 그려나갈 때 색다른 기분에 잠겨간다. 나는 불쑥 종이의 가운데 쯤에 선을 그어 담을 묘사했다. 담 안쪽에 포도나무를 그려 가지를 담 밖으로도 나아가게 했다. 담 안쪽과 바깥에서 꼬마들이 각기 포도를 따먹는 모습을 그렸다. 내가 어릴 때의 풍경이다. 종이의 여백에 '포도나무는 담을 넘은 것이 아니다'라고 적었다.

역설이다. 그림에선 포도나무가 담을 넘은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 논리를 따라 가면 담을 경계로 사유지와 공유지로 나눠진다. 담 바깥 골목에서 포도를 따 먹는 꼬마는 사유지의 포도를 훔치는 꼴이 된다. 이러한 의미와 충돌 되도록 문장을 집어넣은 것이다. 해체를 꾀했다고 해도 좋다.

포도나무 입장에서도 포도나무는 담을 넘은 것이 아니다. 인간의 관점에서야 담이자 경계이지 포도나무에겐 그렇지 않다. 포도나무에겐 애초에 담이 아니기에 담을 넘은 것이 아니다. 이런 내용을 그에 맞도록 그린 그림과 함께 페이스북에 포스팅한 후 며칠이 지나자 생각이 좀더 꿈틀거렸다. 스마트폰의 갤러리에서 사진을 뒤져 저 담벽을 찾아냈다. 집이 철거 되기 전에 찍어 둔 것이다. 거기엔 그림이 그려 있었다.

내가 초딩(초등학생) 땐가 중딩(중학생) 땐가 집 수리를 할 때였다. 형은 그림을 잘 그렸는데 대못을 찾아 손에 쥐더니 담으로 걸어갔다. 시멘트 공구리(반죽)가 발라져 마르기 전이었다. 슥삭이더니 농부가 소달구지를 끌고 나가는 모습, 커다란 물소를 그렸다. 난 그 그림 벽화가 좋았고 그것으로 인해 우리 집이 왠지 문화적으로 보였다.

그림 벽화가 담긴 사진과 함께 페이스북에 이렇게 포스팅했다. 경계였던 담을 90도로 돌려 그림이 그려진 담장으로의 시각 이동을 꾀한 것이다.

이 모두가 대수롭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볼품 없는 그림 실력으로 철거 된 옛집에서 기억 한 조각을 건져 올려 의미를 부여해보고 그것을 또 달리 확장해본 것. 복잡다단하고 중요한 것 천지인 세상에서 그것이 뭐 대수인가.

그럼에도 나로선 그림 속에 그것을 해체하는 문장을 첨가함으로써 미셀 푸코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 담은 사유를 내 식으로 표현한 면도 있다. 그리고 담장 벽화 이미지엔 첫 번째 그림 안에 담겨 있다고 생각되기 불가능한 차원, 흔적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을 열어 보였다. 3차원 면의 조건인 2차원 선으로서 존재하는 그것을 3차원화 시킨 것이다. 그 안에 담긴 또다른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푸코적 사유보다 더 나아갈 수 있을 모색을 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포도나무는 담을 넘은 것이 아니다. 그 담장엔 그것이 경계로 그려진 차원에선 파악 불가능한 세계가 담겨 있다. 파악 불가능이 파악 가능이 될 수 있는 단초는 그림 안에 담겨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파악이 불가능하다. 차원이 다르기에. 차원성, 연속과 단절, 안과 밖,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등등이 두 장의 연속 이미지 안에 창조적 폭발력을 무위로서 머금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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