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예도보통지 서문은 정조의 친필로 사도세자(小朝)의 무예이야기를 썼다.
'무예도보통지'의 서문은 정조가 정리한것이며 사도세자의 무예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무예도보통지 바탕은 사도세자의 '무예신보'

조선의 학문은 중국의 문학과 경술(經術)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러한 중국의 영향을 탈피하려는 노력이 영조와 정조때 이루어지면서 새로운 학풍을 만들어냈다. 이 중에서 정조는 문장에 능해 '홍재전서'라는 대저술을 했고, 시대에 맞는 조선의 성전과 고실(故實)에 관한 것들로 '국조보감', '대전통편', '문헌비고', '해동읍지', '규장전운', '오륜행실' 등을 편찬했으며, 이와 같은 대표적인 저술에 '무예도보통지'도 포함돼 있다.

그러나 무예도보통지의 기본 바탕은 영조 35년(1759) 사도세자에 의해 간행된 '무예신보(武藝新譜)'였다. 무예신보는 원래 명칭이 '무기신식(武技新式)'이었으며, 무예도보통지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무예신보'로 개명한 것이다. 이 무예신보는 현재 실존하지 않으나 무예도보통지의 서문에 잘 나와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사도세자는 모든 일을 대신 처리하면서 죽장창 등 12가지의 기술을 추가해 '도보'를 만들고, 기존 무예제보의 6가지와 함께 훈련을 하도록 했다. 이것은 '현륭원지(顯隆園志)'에도 십팔기(十八技)라는 이름과 함께 이 이야기가 나온다. 또한 사도세자의 문집 '능허관만고'에 '예보육기연성십팔반설(藝譜六技演成十八般說)'라고 하여 18가지 무예를 언급하고 있다. 정조는 이러한 사도세자의 무기신식(무예신보)의 의식과 전형을 이어받았고, 여기에 마상무예 6가지를 추가해 24가지의 무예를 정리한 무예도보통지로 완성한 것이다.

무예도보통지 제1권에는 사도세자의 무예신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무예도보통지 제1권에는 사도세자의 무예신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도세자, 무예에 능했고 조예가 깊었다

그가 무예신보를 편찬한 것에는 당시 정치적인 환경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책을 편찬하던 시기에는 사도세자와 영조의 관계가 악화된 상태였으며, 무반세력과의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다보니 그는 새로운 무반층을 육성하기 위한 무예서 편찬에 대해 열중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무예제보를 바탕으로 한무예의 보급과정과 훈련과정에서 무예가 왜곡됐거나 변형에 따른 부작용으로 무예를 평가하는 준거가 필요했을 수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체계적인 무예서 편찬작업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이 무예서를 계기로 고립됐던 사도세자가 극복하지 못하고 당쟁에 휘말려 희생됐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추측은 그의 문집인 '능허관만고'에 훈련도감 교련관 임수웅이라는 인물의 등장에서 알 수 있다. 무예신보는 하급무관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편찬됐고 기존 무예제보의 내용인 기효신서의 6가지 기술을 모두 알고 있던 임수웅에게 12개의 기술을 추가해 성과를 얻어냈다. 특히 기효신서의 6가지와 무예제보번역속집의 4가지 이외에 6가지를 추가한 것이 모두 단병기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7세기이후 조선은 포병, 기병, 보병 등의 삼병의 통합적인 전술체계가 정착된 시기였다는 점에서 장거리 무기인 화포와 궁시를 비롯해 단병기를 강화해 장병기와 단병기의 조화를 요구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도세자의 명예회복 노력

정조는 재임기간 동안 아버지인 사도세자에 대한 신원(伸寃)과 추존(追尊)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여기서 신원이라 함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죄를 풀려는 노력이며, 추존은 왕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사도세자를 높이는 뜻으로 제왕의 칭호를 주는 일을 말한다. 이러한 일은 어쩌면 정조 자신 때문에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라는 아픈 기억이 있었는지 모른다.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의 회고록인 '한중록'에는 사도세자가 혜경궁에게 당시 심정을 털어놓은 이야기가 나온다. 영조는 세손이었던 정조를 귀하게 여겼고 세자에게 거리를 두기 시작하면서 세손을 효장세자의 양자로 한 다음 후계자로 세울 경우 자신은 죽을 수 도 있다고 예견했다. 실제 그 예견은 그대로 맞아 떨어졌다. 외척, 노론과의 갈등 속에서 무예신보를 만들어 무반의 세력을 만들려 했던 사도세자는 정조가 보았을 때 갈등의 주체로 보였을 것이다.

허건식 체육학 박사, WMC기획경영부 부장
허건식 체육학 박사·WMC기획경영부 부장

결국 갈등의 주역인 세자를 영조, 외척, 노론들과 죽이고 정조를 후계자로 세웠다. 이를 지켜본 정조의 마음 속에는 세자의 죽음이 자신과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한을 풀어주기 위한 노력으로 무예도보통지를 완성했을 것이다. 정조역시 재임중 세자의 죽음을 몰고 간 세력들에게 위협을 느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무예를 중시 여겼고 경호인력을 강화했다. 사도세자가 무예신보를 편찬한 배경과 다를 바 없었던 정조역시 무예도보통지의 편찬을 통해 이를 극복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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