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일 칼럼] 최동일 논설실장

대한민국을 순식간에 뒤덮으며 맹위를 떨치는 코로나19가 전세계를 공포로 몰아가고 있다. 발원지인 중국은 이제 소강국면에 들어갔다지만 유럽은 바람앞 등불 신세가 돼 속수무책이다. 지구촌 6대륙 모두에서 급속 확산되고 있는 신종 감염병으로 각국이 초비상 상황에 빠진 중에도 세계인의 눈길을 끈 지구촌 뉴스가 있었다. 지난 8일 '세계 여성의 날'이 그것이다. 급기야 팬데믹에 이른 코로나19에 가려 크게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일부 국가에서는 전국적인 파업이 진행되고 대규모 시위가 펼쳐졌다. '소리없는 아우성'이 이제 소리를 낸 현장이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많은 국가가 기념행사를 열지도 못할 정도로 사회적 분위기가 못 따라갔지만 중남미 멕시코에서는 여성의 절반 이상이 파업에 동참했다. 전체 인구의 1/4 가량인 3천600여만명이 사회활동을 중단한 채 그들의 목소리를 높인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투쟁대상은 임금도, 회사도, 물가도 아니었다. 이 나라에 만연한 여성 대상 폭력이 그들을 하나로 뭉치게 한 것이다. 실제 멕시코에서는 하루 평균 10명이 넘는 여성이 살해되고 있다. 마약과 납치 등 강력범죄보다도 여성에 대한 성폭력, 가정폭력, 증오범죄에 그들은 분노하고 있다.

이들이 극단적인 파업을 선택한데에는 끊이지 않는 범죄속에서 발생건수가 늘어나는 등 검거와 처벌이 뒷전인 정부의 미흡한 대처가 있다. 한마디로 여성에 대한 차별이 밑바닥에 깔려있는 것이다. 이는 멕시코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날 중남미 칠레, 브라질,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등에서 벌어진 시위들도 같은 이유를 갖고 있다. 그럼에도 이 문제가 쉽게 나아지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 지역 문화에 배인 고질적인 마초주의(남성중심, 남성우월) 때문이다. 결국 인류가 십수만년 문명(文明)을 쌓고 있음에도 인류 반쪽의 안전을 책임지지 못하는 것이다.

중남미를 벗어나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무렵 코로나19로 신음하던 동남아의 여성들도 가정폭력과 과도한 노동에 내몰리고 있다. 또한 불안한 고용과 보장받지 못하는 인권 등 비슷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 경기 침체에 여성지위가 더 취약하다는 점도 같다. 이들과 많은 차이를 보이지만 대한민국도 차별이란 잣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기업을 비롯해 기관·단체의 고위직은 여전히 유리천장이며 가정폭력 근절은 요원하다. 여성취업 증가세에 따라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워킹맘 비율이 높아지면서도 노동에 대한 부담은 좀처럼 줄지 않고 있다.

이처럼 인류가 어렵게 형성한 문명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안전을 제대로 책임지지 못하는 상황은 최근 코로나19가 보여준 감염병도 마찬가지다. 아니, 갈수록 더 나빠질 조짐을 보인다는 점에서 더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시간이 많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많은 전문가와 세계적인 석학 등 유명인사들이 한목소리로 경고했듯이 기후변화와 감염병 창궐이 인류를 위협하고 있다. 인류가 문명이라고 자랑삼아 내세우는 것들이 언제부터인가 우리 삶의 터전을 황폐화시키고, 환경을 파괴하며 결국 인류 멸종이라는 잘못된 길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돌도끼에서 시작된 인류 문명과 이를 바탕으로 한 문화가 인류의 희망이 아닌 비극이 되는 밑바닥에는 이기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혐오와 증오를 부르는 여성차별이 오랜 관습 등에 따른 남성우월주의에서 비롯되고 있듯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감염병 창궐은 인류의 오만에서 비롯되고 있다. 자연과 생태계를 무시하고, 인간의 편의와 편리만을 위해 선택했던 많은 것들이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문명이 잘못된 길로 빠져드는 순간 편리하고 빛나던 이기(利器)들이 인류를 번영이 아닌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수 있고 그 시작은 이미 벌어졌다.

최동일 논설실장
최동일 논설실장

문명이라는 인류가 이룩한 물질적·사회구조적 발전과 여성차별이라는 현실에는 상당한 거리감이 있다. 그러나 그 거리감은 전세계적 감염병과의 사이에서 더 크게 느껴진다. 이는 개선의 여지 때문이다. 상대가 사람이 아니라서 감염병에 대한 조치가 더 더디고, 더 어려울 수도 있다. 반대로 그러기에 우리는 더 서둘러야 한다. 앞으로 '여성의 날' 더 큰 목소리가, 더 많은 곳에서 터져 나오면 시간은 좀 걸릴지라도 인류문명은 더 빛나게 된다. 정작 문제는 이런 날이 올때까지 지구와 환경이 인류의 문명을 지켜줄 수 있을 지 장담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