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민정 수필가

가까이 다가가 볼수록 앙상한 속살은 누구에게도 곁을 내어 주지 않을 듯 까칠하다. 온기마저 모두 달아난 이 나목을 박수근 화백은 선이 굵고 힘차게 표현했다. 살갗이 터지고 허리가 뒤틀리고 발가벗었지만 쓰러지지 않는 모습은 전쟁의 위기 속에서 흔들리는 민중들에게 힘을 주고자 늠름하고도 의연함을 화폭에 담았다. 그는 나목을 다시는 피우지 못할 고목이 아니라 잠시 성장을 멈추고 닥쳐온 어려운 한 시기를 극복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강하게 표현했다. 험하고 멀기만 한 전쟁 속에도 봄은 반드시 온다고 믿으며 위안과 희망을 놓지 않았던 것이다.

잎도 꽃도 떨군 앙상한 나무들이 산을 부옇게 덮고 있는 등산로를 걷는다.

나무들은 아직 나목이라는 이름을 달고 산속을 수묵화로 붓 칠해 놓았다. 이 삭막함이 오히려 마음을 비우게 하여 차분해진다.

아직은 봄바람이 손끝을 시리게 하지만 산은 초록공기를 대신해 봄기운으로 온몸을 샤워시킨다. 산은 아직은 아무나 들이기 싫다는 듯이 좁은 길은 끝까지 긴장을 놓지 못하게 했다.

나목은 허구가 가미되지 않은 선함과 진실함이 그대로 나타나며, 치장하지 않고 향기마저 함부로 뱉지 않는다. 푸른 옷과 색을 벗은 대신 말없이 오로지 절개와 수행을 입었다.

이런 나목 같은 길목을 넘어 온 그가 저기에 있다. 그는 불어오는 바람을 그대로 맞고, 비마저 간직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흘려보냈다. 가난한 촌부의 아들로 태어나 내로라는 공직에서 한 길로만 걸어왔던 그였다.

정년을 하면 마음껏 날아다니며 살겠다며 새도 아닌데 산 속에 갇혀 지낸 삶은 그의 청렴과 정직함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치장하지 않은 수더분한 성격에 성실과 열정만이 그에게 서기관의 영광이 주어졌을 뿐이었다. 차분한 자기성찰로 친구들로 하여금 '장 그턱'이란 별명을 가졌다. 변함없다는 말이다. 위선의 잎을 입고 사는 몇몇 친구들은 그의 내세우지 않는 자존감을 은근히 부러워했다.

그는 상대의 마음을 여는 힘이 있고, 대화를 유창하게 하지 않아도 존재감이 있었고, 매력적으로 보이려고 무리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 말 잘하는 사람보다는 말을 하게끔 만드는 사람이었다. 늘 곁에서 거목처럼 흔들림 없이 몸짓 하나 하나에서 풍겨 나오는 여유와 아우라는 꾸미지 않아도 빛이 났다.

늘 함께 있으리라는 다짐을 버리고 모두에게 배신자가 되어버린 그는 언제나 남들보다 한발 앞서더니 저 세상도 한 발 앞서 가버렸다.

앙상한 나목에서 그의 순수한 기운이 끝없이 스며 나온다.

그가 남긴 정겨움으로 외로움을 떨쳐내고 산은 마음을 따뜻하게 품었다. 산으로 들어가면 마음이 따뜻한 것은 진실을 드러내는 순수만으로 품어주기 때문이다. 세속의 욕심을 겹겹이 입고 올라온 사람들도 산에 오르면 가면을 벗어 던지고 나목이 되어 진실함을 드러낸다.

어느 덧 그가 수목장으로 누워있는 나무 앞에 섰다. 검은 교복에 모자를 눌러쓴 남고생의 모습을 닮은 나목이 심장을 끌어 잡아당긴다.

김민정 수필가
김민정 수필가

봄 중에 가장 좋은 봄은 '다시 봄'이라 했던가, 곡우가 되면 연록 빛 새순을 수줍게 입고, 여름이 오면 녹음 짙은 옷으로, 가을이 되면 곤룡포를 갈아입고 다시 만날 그를 생각하니 이 자리가 더욱 애틋해진다.

망울망울 싹을 품은 나무가 투명한 햇살아래 빛난다. 나뭇가지 사이로 비추는 새 빛은 눈물방울의 빛이다. 그는 참 괜찮은 나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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