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일 칼럼] 최동일 논설실장

갑자기 따사로워진 봄볕에 청주 무심천변 벚꽃들이 무더기로 속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산과 들은 물론 도심속 손바닥만한 빈터에도 꽃망울이 한창이다. 봄비가 지난간 자리에는 흐드러진 꽃대궐이 준비중이다. 그야말로 만화방창(萬化方暢) 꽃의 계절이 돌아왔다.

이맘때면 꽃구경 나온 사람들로 무심천변이 북새통을 이뤘을텐데 올해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주말부터 적지않은 인파가 몰렸지만 예년에 비할 바가 못된다. 아직 만개까지 시간이 좀 남았지만 상춘(賞春) 소식으로는 부족할 듯 싶다.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의 또다른 단면이다.

감염에 대한 걱정이 꽃의 유혹을 무색케 만들고 있다. 이맘때 전국 곳곳에서 열리던 각종 봄맞이 축제가 줄줄이 취소·연기됐다. 꽃을 주제로 한 것이 아니더라도 사람이 모이는 행사나 축제는 구경조차 하기 어렵다. 안 열리는 곳이 없을 정도인 벚꽃축제는 물론 남도지방의 매화·산수유·동백꽃 등 예외가 없다.

어떤 지역에서는 하루빨리 꽃이 지기만을 기다린다고 한다.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지경이니 격세지감이다. 이러한 부담감이 꽃구경에 그치면 다행이지만 노루꼬리만큼 짧은 계절, 봄 나들이를 모두 망칠 듯 싶어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사람들의 불안감속에 봄 축제가 사라진 오늘을 만든 것은 우리 자신이다. 지금의 확산을 막을 기회를 놓친 것도 그렇고, 생태계를 무시한 오만으로 신종 코로나를 불러온 것도 그렇다.

게다가 이유와 무관하게 우리가 벌인 판이 우리의 발목을 잡는 상황이다. 확산 차단을 위한 공간 유지를 말하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물리적 거리가 아닌 사회적 관계가 멀어지는 부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다. 단순히 개인적 활동의 위축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구조가 틀어지고 공적인 부분까지 최소한의 동선에 묻혀 버리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이같은 상황과는 정반대의 모습도 코로나19가 연출하고 있다. 약국 앞에 늘어선 마스크 줄서기가 그것이다. 정부에서 물리적 거리를 두라고 노래를 부르지만 개인위생을 위한 마스크를 구하기 위해 물리적 거리를 포기해야 할 판이다.

더구나 이같은 노력에도 여전히 마스크를 구하는 일이 녹록치 않다.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끝 모를 줄서기는 사재기를 떠올리게 한다. 사재기는 코로나19 사태가 팬데믹으로 커지자 선진국에서 버젓이 일어날 정도로 재난의 상징과도 같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는 이를 찾아볼 수 없다. 오래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흔적조차 없다.

외국에서도 주목한 사재기 없는 풍경의 밑바탕에 성숙한 시민의식이 있지만 가장 큰 요인은 잘짜여진 택배시스템에 있다. 온라인으로 주문하면 생필품 등 받지 못할 물건이 없는데 무엇하러 매장을 찾아가 사재기를 하느냐고 반문할 지경이다.

이는 현실적인 이유지만 신뢰의 문제이기도 하다. 마스크 처럼 온라인은 커녕 공장을 찾아가도 구하지 못한다면 곧바로 대란이다. 그것도 방역 필수품이라면 어떤 수고라도 마다할 수 없게 된다. 결국 우리의 마스크 줄서기는 믿음이 무너진데서 시작됐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이해를 구하고 대책을 내놓았으면 될 일이다.

최동일 논설실장
최동일 논설실장

헛발질의 대명사가 된 지금의 마스크는 그냥 마스크가 아니다. 감염병에 맞설 최소한의 개인적 자산이자 무기다. 풍족하면 할수록 만족도가 높아지지는 않지만 일정 수준 뒷받침이 안되면 살아가는데 큰 제약을 주는 것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돈, 건강 등이 그런 것처럼.

이렇다보니 마스크 줄서기에 불평등이 뒤따른다. 줄에 따라 달라지고, 똑같이 줄도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희망고문이라는 말이 괜히 나왔겠는가. 이제 얼마 뒤면 얼굴용 마스크는 다시 주머니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언제 또다른 마스크가 줄서기를 강요할 지 모르는게 우리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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