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더 그래픽(The Graphic)' 1902년 2월호에 실린 서울근교의 석전 삽화 모습.
영국의 '더 그래픽(The Graphic)' 1902년 2월호에 실린 서울근교의 석전 삽화 모습.

오랜 전통을 가진 석전(石戰)에 대한 사실적 표현은 19세기말과 20세기 조선에 머물던 외국인들에 의해 자세히 기록돼 있다. 특히 대한제국의 서울과 평양에서 석전이 유행했음을 말해주는 기록들은 당시 우리만 그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었으며, 중국과 일본에는 명맥이 끊겨 흔하지 않았던 독특한 문화였다. 이러한 석전에 대해 근대적 접근은 일본인들에게 의해 이뤄졌다.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은 석전을 원시적 전쟁술의 유풍이라고 했다. 단오의 석전이 고려에 전래됐고 이것이 조선시대 정월에 일종의 여흥으로 내려온 것이며, 일본의 인지타(印地打, 인지우찌)로 전래됐을 것이라는 인류학 보고들도 있다.

석전은 고대부터 어떤 개천 하나를 중심으로 삼고 돌을 던지고 싸웠으며, 부상자가 속출하기도 했다. 이 석전에서 이긴 마을은 풍년이 든다거나, 과거급제자가 많이 나온다고 믿었고, 패한 마을은 흉년이 들거나 그 해 기운이 좋지 못하다고 믿었다. 이러한 석전이 근대에 들어와 수 천 혹은 수 만명씩 양파로 나뉘어 일정한 지점에서 서로 돌을 던지고 싸웠다. 그리고 후반부에는 짧은 몽둥이(棍棒)로 단병 접전을 해 한쪽이 참패해야 끝이 났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상자도 많이 나오고, 주변의 가옥이나 상점이 파손되는 일도 있었다.

실력은 평양, 관람은 종로

근대 석전은 서울과 평양에서 크게 유행했다. 석전중에서 가장 위험하고 장쾌한 싸움은 '편싸움(편전)'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에 평양에서 있었던 석전의 마지막 날인 정월 15일에는 평안감사가 이를 관전했을 정도였다. 당시 평양 사람들은 머리에 돌 맞은 상처가 없으면 남자의 치욕으로 여겼고, 석전에서 패해 집에 도망쳐오면 어머니가 이를 질책해 돌려보냈다고 한다. 평양의 석전은 전국적으로 유명해서 '비석이타인(飛石而打人) 비석경타인(飛石更打人)'이라는 무풍(武風)을 가지고 있었다. 근대 석전의 기록에는 주로 대동강 연안의 만수대 등지에서 벌어졌다. 평양 출신 장정들의 돌 던지는 재주도 명성이 높아, 서울 서대문밖 녹개천 편전에서는 구경 나간 평양출신의 병사들이 분위기에 못 이겨 돌팔매질을 가끔 했는데, 이들이 던진 돌은 백발백중이었고, 이를 얻어맞으면 한 동안은 저승 구경을 갔다 오기가 일쑤였다는 기록도 있다.

서울의 석전은 종로 조산(청계천의 양쪽에 흙을 쌓아 올린 곳) 편전은 구경꾼들에게는 가장 좋은 장소였다. 이 곳은 석전을 하는 이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성안의 종로의 석전은 기본적으로 넘어진 적에게는 매질을 하지 않는다는 도리가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규칙을 무시하고 물의를 일으키는 편은 성 밖의 녹개천 사람들이였으며, 이 때문에 매년 한두명의 사상자를 내기도 했다. 석전은 어린이의 석전을 시작으로 해 청소년들의 석전, 나중에 일류 매질꾼이라 불리는 전문적인 편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이 중에는 남들의 눈에 잘 띄게 하기 위해 나막신을 신고 나오는 이도 있었다. 성내 매질꾼은 발길질을 잘하는 것과 몽둥이가 짧은 것이 특징이었고, 녹개천 매질꾼들은 무명풍차바지에 두루마기를 걸쳐 입고 흰 버드나무 몽둥이 3, 4개를 가진 것이 특징이었다.

종로의 매질꾼들은 체력이 약했지만 날쌔고 꾀가 많아 가로로 흩어져 단체적으로 몰아 들어가고, 녹개천 매질꾼들은 무식하기는 하나 힘이 셌다. 양쪽에는 작전을 짜는 모사(謀士)가 있고 구호소가 있었다. 구호소란 머리에 부상을 당한 사람에게 솜으로 닦아 주는 정도로 간단한 응급처치를 하는 곳이었다. 이러한 편전을 본 당시의 사람들은 장쾌하다는 표현을 쓸 정도로 볼거리였다.

정부의 금지령에도 지속

석전이 열리기라도 하면 항상 위험한 상황이 벌어진다는 점에서 정부는 이를 금지하고 경찰들도 이를 저지하려 애썼다. 하지만 당시 경찰인 순검(巡檢)만으로는 대중들의 힘을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군인들을 보내 이를 막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을 저지하러 간 평양의 군인들이 매질꾼으로 돌변해 활개한 일도 있었다. 이렇다보니 나중에는 편전이 열리는 장소에 총을 세워놓고 저지하기도 했다.

근대의 석전은 두 편으로 나누어 서로 돌을 던지며 싸워 승부를 가르는 일종의 집단적인 세시풍속으로 인식했다. 하지만 석전은 마치 실제 전투처럼 격렬하게 벌어지면서 그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들과 가옥들이 파손됐고, 이 때문에 관헌에서 금령을 내리기도 했지만 쉽게 근절되지 않았다. 이러한 석전이 일반적인 민속놀이와 달리 전투적이고 위험성이 있는데도 오랫동안 전해 내려왔다.

허건식 체육학 박사·WMC기획경영부 부장
허건식 체육학 박사·WMC기획경영부 부장

또한 석전중에 부상당한 피해자들이 가해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고 이를 처벌할 법률도 없었으며, 오히려 그 부상당한 상처를 영광스럽게 생각했다는 것은 기존 민속놀이와 너무 달랐다. 이처럼 석전은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축제나 민속놀이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폭력성과 무질서, 그리고 수많은 일탈행위 등이 용인됐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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