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칼럼] 권택인 변호사

오래전 일이다. 어깨 탈골로 지옥같은 고통을 경험한 적이 있다. 평화롭게 길을 걸어 가다가 정신이 온전치 않아 보이는 스트리트 파이터로부터 묻지마 도발을 당하고 이를 응징하기 위해 준비운동(?) 없이 주먹을 날리고 땅에 엎어치다 땅을 잘못 짚어 생긴 결과이다.

어깨뼈가 빠지면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이 크다. 119를 불러 병원 응급실로 가는데 도로의 과속방지턱과 요철이 고스란히 통증으로 전해져 가는 내내 구토를 할 정도였다. 응급실에 도착하고 나서도 필자보다 더 급한 환자들이 먼저 있었던 탓에 고통이 익숙해지고 정신이 아득해질 무렵이 돼서야 피곤에 지쳐 다크 써클이 턱까지 내려와 있는 응급실 의사를 만날 수가 있었다.

그 의사는 필자의 고통에 공감해주면서 순식간에 어깨뼈를 맞춰주었고, 그 순간 그심했던 통증은 마법처럼 사라졌다. 필자가 감사해하며 얼마나 아팠는지 고통을 설명하자, 그 젊은 의사는 싱긋 웃으면서 여성들이 아이를 낳을 때는 어깨탈골의 만 배쯤 아프다면서 여자들을 존경하라는 농담같은 말을 남기고 다른 응급환자를 향해 의사가운 휘날리며 뛰어갔다. 세상을 구원하고 떠나는 신의 뒷모습이 바로 그렇지 않았을까.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들 한다. 필자도 그 말에 동의하는 편이다. 하지만, 재화와 용역에 대한 수요와 공급에 따라 매겨지는 가격에 따른 직업의 귀천이 아니라, 절대량으로 세상에 더 많은 편익을 주는 직업이 더 귀한 직업이라는 생각도 크게 틀린 생각은 아닐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의료업만큼 귀한 직업이 또 있을까?

하지만 선망이 되었든 질시가 되었든 의료인을 바라보는 일반인의 평가는 그들의 넉넉한 경제사정이 주된 기준이 된다. 그들의 헌신이나 의료인들이 가지는 사회적 가치를 고려하기 전에 그런 세속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어쩌면 의료라는 숭고한 업의 가치에 대한 모욕이라는 생각이 든다.

의료행위는 그 자체로 엄청난 리스크 있는 행위이다. 응급환자가 가지고 있던 특이 체질, 어쩌면 현대 의학이 아직 도달하지 못하여 미처 알 수 없었던 재난 같은 원인들로 인해 환자에게 불행한 결과가 생길 위험이 상존한다. 위험이 현실화되면 스스로 충격을 받고 법적 책임을 따지는 것조차 지레 포기하는 의료인들이 적지 않다.

그들이 피할 수 없었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는 경우도 종종 생기는데, 이와 같은 사건이 쌓일수록 의료인들은 방어적 진료에 집중하게 된다. 결국 그 피해는 미래의 환자나 그 가족의 몫으로 돌아가게 될 수밖에 없다. 의료행위에 대한 사회적 이해도를 높여야 할 필요성도 있다고 생각된다.

의료인들은 의료행위 자체의 리스크뿐만 아니라 각종 사회적 위험에도 노출되어 있다. 그들이 의료인이 되기 위해 대학진학 공부할 당시는 물론이고 의학을 전공하여 자격을 취득하고 실무 수련과정에서 의술 이외의 것에 관심을 두기 어려울 만큼 고단한 삶을 살았던 까닭에 나이에 비해 어린 아이같은 순수함이 있다.

때문에 의료현장에서 죽음의 신과 맞장 뜨면서 환자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카리스마 넘치는 의사들도 일반 사회생활에서는 쉽게 뜯어 먹히는 말랑말랑한 이웃(?)으로 받아들여진다. 부의 재분배와 관련해서 어쩌면 그들이 납부하는 세금의 역할보다 이런저런 사유로 새는 돈의 역할이 더 클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요즈음 코로나19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수많은 의료인들이 방역에 투입되고 있다. 혹자는 의료인을 갈아 넣어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응한다고 할 정도의 상황이다. 그 외 의료인들 역시 의료붕괴를 막기 위해 방역에 투입된 동료의 빈자리를 채우느라 사투를 벌이고 있다. 지금은 필자의 어깨탈골 처치와는 차원이 다른 의료인들의 역할이 필요한 때이고, 우리 의료인들은 전 세계 어떤 의료인들보다 헌신하는 것으로 그 필요성에 응답하고 있다.

권택인 변호사
권택인 변호사

필자의 탈골 통증을 마법같이 사라지게 한 것처럼 의료인들이 코로나19 바이러스를 거짓말처럼 없애주기를 소망한다. 이번 주에는 필자 주변의 의료인들에게 따뜻한 밥 한끼와 고단함을 잊게 해줄 소주 한잔 대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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