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김윤희 수필가

난분분 꽃구름이 봄의 허리를 휘감아 돈다. 발길 뜸한 산야에서 제풀에 자지러진 꽃들이 처연하다. 자고나면 연일 방송에선 사람들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두라며 이웃 간 접촉을 떼어 놓는다. 듣도 보도 못한 일이다. 유치원과 학교에는 개나리꽃으로 재잘댈 아이들의 발그림자를 구경할 수가 없다. 대학 입학의 꿈을 위해 숱한 세월 책장에 얼굴을 묻으며 어려움을 이겨낸 새내기 대학생들은 입학도 해 보지 못하고 발이 묶였다. 기대와 설렘 가득한 캠퍼스가 조용하다. 봄비초차 먼지잼으로 그치고 만다.

우리에게 4월은 무수한 희생을 딛고 함께 걸어온 아픈 역사다. 올해 역시 기어이 또 하나의 옹이를 만들고야 마는가. 인내와 기다림이 퍽 오래간다. 아이들 등교가 또 미루어진다. 인간과 바이러스와의 전쟁이 창궐한 지 벌써 4개월째이다. 인내가 막바지 시험에 든다. 저들은 철저히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스며드는 게 작전인가 보다. 맞대응 책으로는 손을 씻고 마스크를 쓰게 하는 것이다. 가까운 사람들과 만남을 중지하고 거리를 두란다. '사회적 거리두기'다. 이 생경한 단어가 어느새 일상으로 자리를 잡아간다.

날 따시고 꽃잎은 흩날리는데 갈 데가 없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은 가서도 안 되고, 오지도 못하게 한다. 꽃 축제를 취소하며 사람들이 몰려올까봐 전전긍긍이다. 곱게 가꿔 놓은 꽃대궐이 무색하게 됐다. 어이없는 일이지만 이것이 현실이니 어쩌랴.

4월 15일 국회의원 총선에 앞서, 10일 사전투표를 마치고 두타산으로 향했다. 진천에서 초평으로 가는 국도의 벚나무는 일찌감치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고 서서 한창 꽃을 피워 물었다. 수상한 시절에도 의연하게 제 할 일에 충실한 꽃무리가 눈부시다. 보아주는 이가 있든 없든 흐드러진 꽃잎이 분분, 마음을 잡는다.

해발 589미터 두타산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다. 체력에 따라 능력에 맞는 코스를 골라 갈 수 있다. 초평 영수사로 오르는 길과 붕어마을에서 오르는 길은 두서너 시간 제대로 산행을 즐길 수 있다. 산행이 어려운 사람은 전망대까지 차를 타고 가서, 바로 전망대 탑을 올라 사방을 조망할 수 있다.

또 다른 방향은 짧은 산행코스다. 전망대 가는 길 7부 능선쯤에 이르러 차를 주차 시켜 놓고 오른쪽 산길로 느릿느릿 30분쯤 걸어 삼형제봉에 이르는 길이다. 무리 없이 산맛을 느낄 수 있다. 아기자기한 바위가 정겹다. 중간 중간 돌탑이 눈에 요깃거리로 맛깔 난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괴석과 사람이 쌓아올린 돌탑이 소나무, 진달래 군락지와 환상의 조화를 이룬다. 진달래 꽃빛은 유년의 빛깔 그대로를 간직한 채 위안이 되고 있다. 꽃무리 저 한가운데 어디쯤 어린아이 간을 빼 먹는다는 문둥이가 도사리고 있지 않을까. 어릴 적 들었던 전설을 눈으로 읽는다. 배고픈 시절 꽃잎을 따 먹으며 허기를 달래던 우리의 아픈 과거가 붉은빛으로 흥건히 되살아난다.

진달래 꽃밭을 딛고 우뚝 선 삼형제봉은 푸른 물결을 품고 있는 한반도 지형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곳이다. 탁 트인 조망권 안으로 들어온 호평호가 한 폭의 수채화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바다가 없는 충청북도, 진천 초평호는 한반도 지형을 품고 있다. 제주도에 해당하는 섬까지 갖춘 온전한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푸른 용의 형상으로 한반도를 끌어안고 도약을 꿈꾼다. 초평호 안에 있는 제주 섬은 만개한 벚꽃으로 인해 하얀 꽃섬에 되어 오도카니 앉았다.

지금 바다 건너 제주도에서는 절정에 이른 유채꽃밭을 갈아엎고 있다. 아름다움이 죄 아닌 죄가 되어 거대한 트랙터의 바퀴아래 짓밟히고 있는 거다. 정성들여 가꾼 꽃이 흙속으로 묻혀가는 모습을 보는 농부의 마음은 어떠할까. 난리가 따로 없다. 언제 어느 때 스며들지 모르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공포가 이리 사람을 경계하게 한다. 온 세상을 들쑤셔 놓는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미국을 비롯한 유럽, 각국에서는 더욱 치열하게 난리를 치르고 있다. 늘 우리나라를 얕잡던 일본 역시 입을 가리고 우리의 대처 방안을 슬금슬금 넘겨다본다. 대한민국의 대응책이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방역당국과 의료진, 국민의 선진의식이 맞물려 대처를 잘 해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김윤희 수필가
김윤희 수필가

어려울수록 똘똘 뭉쳐 이겨 내는 저력이 우리에게 있지 않는가. 저 혼자 피고 진 봄꽃이 응원하듯, 연초록 이파리를 무성히 피워 올리고 있다. 푸릉푸릉 희망이 바람을 타며 4월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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