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말기 상해에서 발간된 점석재화보(点石齋畵報)의 중노난범(衆怒難犯)
청나라 말기 상해에서 발간된 점석재화보(点石齋畵報)의 중노난범(衆怒難犯)

일제강점기, 민족감정으로 대항

고대부터 이어져온 석전은 우리나라에서는 근대에까지 그 명맥이 유지됐다. 이를 보다 못한 일제는 석전을 금지하기 위해 법을 제정함과 동시에 경찰을 동원해 강압하기도 했다. 그러나 석전을 막기 위해 공권력을 동원한 일제에 오히려 공격을 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당시 일본어판인 경성일보에는 "1908년 2월초 서울의 서호(西湖, 마포에서 서강에 이르는 15리 지역)에서 천 여명이 모여 밭을 사이에 두고 석전을 했는데, 그 가운데 곤봉 든 사람을 체포하자 석전꾼들이 경관들을 포위 공격했고 이에 경관들은 발포해 포위망을 뚫고 도주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물리적 탄압은 곧 석전군(石戰軍)들의 민족적 감정을 자극해 오히려 석전도중 일제의 공권력에 저항하거나 공격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청나라 말기 상해에서 발간된 '점석재화보(点石齋畵報)'에는 중노난범(衆怒難犯, 분노해 일어선 대중을 당해 내기 어려움)'이란 그림과 그에 대한 설명이 실려 있는데 이것은 상해에 온 조선인에게 직접 취재한 기록이다. 여기에는 조선인들은 처음에는 욕을 하며 대응하다 힘을 겨루고, 그 뒤 투석으로 발전해 도망가기도 하고 부상자나 사망자도 발생했는데 지방관들은 이를 금지시키지 못했다. 일제는 이를 금지시키고자 순포(巡捕, 경찰의 중국식 표현)를 파견해 체포하려 했으나, 이를 보고 격노한 석전을 하던 두 개 의 마을이 합해 이들에 맞서서 투석을 반복했다. 순포들은 부상당해 도망쳤고,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석전이 계속됐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새로운 법을 제정해 조선인을 위협했지만 이를 따르는 조선인이 없어 일본인들도 어쩔 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람의 목숨까지 잃는 석전이 치열했지만 이를 금지하려는 세력에 대해 서로 석전을 벌이던 마을이 단결해 맞섰다는 것은 외세일 경우 민족 감정과 결합해 격렬한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일제에 대항한 석전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종교, 주술, 공동체, 상무정신 내포

그렇다면 석전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고대인들은 돌(石)이 신의(神意)를 전해주는 매체이며 영원불변하는 존재의 상징으로 인식했다. 돌에는 쉽게 손상되거나 변하지 않는 신성한 힘이 내재해 있으며 돌의 모양새나 움직임을 통해 신의를 파악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돌이나 바위에 신의가 깃들어 있다는 관념이 존재한 이상 이를 통해 미래를 예측하려는 적극적 행위도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점차 의례가 형식화되면서 부수적인 요소가 더해져 오히려 절차는 복잡해지고, 구성원들의 단합을 도모하는 일종의 축제로 발전하면서 유희적 요소도 부가된 것으로 보인다.

'수서(隋書)'에 전하는 고구려 석전은 그 해의 풍년과 흉년을 예측하는 주술적 행사로 추정할 수 있다. 이전부터 돌을 가지고 연초에 행해져오던 점세(占歲)의 의례를 고구려 국가 차원에서 행한 것이 패수(浿水)가의 석전이었다. 패수(浿水)란 특정한 강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국경의 강'을 가리키는 일반명사다. 예를 들어 대동강은 과거 패수(浿水) 또는 패강(浿江)이라 했다. 백제에게 패수는 고구려 장수왕이 위례성을 점령한 475년전까지 북쪽의 낙랑, 고구려와 국경이었던 예성강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대동강은 삼국통일 과정에서 신라와 당나라가 합의한 국경이었고, 통일신라의 국경 하천인 패수(浿水)였다. 이러한 주술적 행사이외에도 유사시에 지방의 석전군을 동원해 전장에 파견하는 형태로 이를 통제했다. 안동과 김해의 석전군을 차출해 왜적 토벌에 활용한 예도 있다.

뉴스포츠로의 석전 개발 필요

조선 후기에도 석전은 국가의 통제 노력은 단속적으로 계속됐지만 결코 근절되지 않았고 대원군 시대에는 일시적이지만 장려까지 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는 강압적인 단속이 이뤄졌음에도 민족 감정과도 결합해 석전대들이 격렬하게 저항한 사례도 있었다. 결국 석전은 장소와 시간, 행위만 보장되면 그 외의 어떠한 상황, 조건도 문제되지 않았다. 이것은 석전이 일상이나 현실과 상대적 거리를 갖고 고유한 영역을 유지하면서 종교적, 주술적 전통을 지속해온 현상이다. 그리고 상무정신과 지역민의 대통단결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세시풍속이나 대동놀이 차원에서 석전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석전이 지닌 상무정신과 대동단결의 일체감은 놀이상황으로 변화했다. 눈을 이용한 '눈싸움'이나 콩주머니를 이용하는 '콩주머니싸움'도 석전의 변신에서 알 수 있다.

허건식 체육학 박사·WMC기획경영부 부장
허건식 체육학 박사·WMC기획경영부 부장

주술이나 전투적 상황이 없는 것을 고려한다면 석전의 변신은 인간의 본성을 구현할 수 있는 놀이, 현대인들의 스트레스 해소, 그리고 단체가 협동심을 발휘할 수 있는 대동놀이로서 누구나 간단히 할 수 있는 놀이라는 가치를 살려 뉴스포츠로 개발해 명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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