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과학] 주민우 옥천 동이초등학교 교사

우리나라 최초의 현수교로 알려진 남해대교. /출처 pixabay.
우리나라 최초의 현수교로 알려진 남해대교. /출처 pixabay.

온 지구촌이 코로나19로 인해 힘든 나날을 겪고 있어 안부조차 묻기 민망한 요즘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국민 모두가 '사회적 거리두기' 실천에 앞장서 코로나19를 물리치고 있습니다. 외신들은 우리의 코로나19 방역 모범 사례를 자국에 보도하며 '한국을 닮자'고 합니다.

어쩌면 코로나19를 이기는 힘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자부심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우리의 자랑스러운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볼까 합니다. '현수교'하면 어떤 것이 떠오르시나요? 아마 부산의 광안대교,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와 같이 큰 탑에서 늘어진 케이블이 다리를 지지하는 멋있는 모습이겠죠. 그런데 이런 현수교 양식이 임진왜란을 겪던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조선 말, 일본의 침략에 맞서 우리를 돕던 푸른 눈의 외교관 '헐버트'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임진왜란 때 전쟁을 총지휘했던 유성룡은 명나라 원군과 함께 일본군을 평양에서 개성까지 몰아내는 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명나라 원군은 임진강에 도달하자 다리를 만들어 달라며 추격을 멈춥니다. 추운 겨울이었던 당시, 다리를 건설할 자재가 마땅치 않아 유성룡은 애가 탑니다. 하지만 그의 눈에 든 것이 있었으니, 바로 '칡덩굴'입니다. 그는 마을 주민들을 총동원해 칡덩굴을 모아 동아줄을 엮게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강의 양쪽에 설치한 지지대에 묶어 강을 가로지르는 최초의 현수교를 만들었다는 겁니다.

현수교의 사전적 의미가 '줄의 힘에 의지하는 다리'이니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가느다란 덩굴에 불과한 칡덩굴이 다리의 재료가 될 수 있었을까요? 첫째, 식물도감을 찾아보면 칡은 '풀'이 아닌 '나무'랍니다. 겨울이 되면 말라죽는 풀과는 달리, 칡은 나무이기 때문에 북녘의 엄동설한에도 산 속에 남아있었던 것이죠. 또한 덩굴은 해마다 굵어지며 길이가 20m까지 자라기도 한답니다. 하지만 요즘엔 아이러니하게도 이 질긴 생명력 덕분에 칡은 유해식물이라는 오명을 지니기도 합니다. 여기저기 뻗어나가며 다른 식물들을 감아 고사시키거든요.

둘째, 가느다란 칡덩굴이 얼마나 질기기에 무거운 무게를 견딜 수 있었을까요? 다양한 환경에서 구한 칡덩굴을 철봉에 묶고 끊어질 때까지 무거운 바벨을 매달아 보았습니다. 금방 끊어질 것 같았던 얇은 칡덩굴들은 100㎏을 거뜬히 버텼으며 어떤 것은 180㎏까지 버티기도 했습니다. 온 마을 사람들이 이런 칡덩굴을 최대한 모아 동아줄을 만들고, 그것을 엮어 다리를 만들었으니 충분히 튼튼했겠죠? 징비록과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몇 만 대군과 화차가 거뜬히 다리를 건너갔다고 합니다.

셋째, 부러지지 않고 유연한 칡덩굴의 구조 덕분입니다. 칡덩굴의 단면을 살펴보면 중심부가 스펀지처럼 말랑말랑하며 그 주위를 질긴 섬유 조직이 다발처럼 감싸고 있습니다. 때문에 중심부가 딱딱한 다른 나무들과 달리 힘이 가해졌을 때 부러지지 않고 유연하게 휘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칡덩굴로 끈을 만들어 쓰기도 했죠. 하지만 칡덩굴도 나이가 들면 다른 나무들처럼 중심부가 목질화된다고 합니다.

쓸모없이 산에 방치된 칡덩굴을 최초의 현수교로 발전시킨 유성룡의 과학적 혜안. 덕분에 그는 정치가가 아닌 발명가로도 기억되고 있습니다.

주민우 옥천 동이초등학교 교사
주민우 옥천 동이초등학교 교사

그가 만든 칡덩굴 현수교는 분명 오늘날 광안대교와 같은 멋진 현수교의 시초였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힘을 모아 위기를 극복한 우리 조상들, 정말 멋지지 않나요? 코로나19로 역대급 재난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도 지금처럼 슬기롭게 이 난국을 이겨낸다면 훗날 멋진 모습으로 기억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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