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칼럼] 권택인 변호사

코로나19 팬데믹 사태가 조금은 진정국면으로 접어든 듯하다. 전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세계를 위기로 몰아넣은 코로나19 사태는 국가 브랜드 순위를 흔들었으며 국경이 닫히고, 물리적 이동은 봉쇄되어 교육시스템 등 전통적으로 오프라인 방식이 지배했던 영역조차 비대면 방식이 주류로 떠오르게 될 정도였다. 이런 거대한 산업 지형의 변동은 본질적으로 개인의 일상의 변화에서 비롯되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가장 확실한 방역수단으로 인식되면서 자가격리 의무자들은 물론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조차 집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현대 산업화 사회의 큰 문제점 중 하나는 인간소외라고 배웠다. 과거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가까운 몇 달전만 해도 인간소외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것은 소통이었고, 그중에도 사람들이 눈을 마주치고 주변과 체온을 교환하는 따뜻한 만남이 적극 장려되었다. 하지만, 이제 전통적 방식으로 이웃간 정을 나누는 행위는 지양해야할 반사회적 행동이 되었다.

옛날(다시하번 말하지만 불과 몇 달전) 생각을 하며 이웃에게 다가서다 바이러스를 옮기기라도 하면 전파자로 낙인 찍혀 언론에 오르내릴 수도 있다. 방역을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는 선택의 여지없는 정답이 되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공기중에 항상 있다는 이름 모를 바이러스들이 엄청나게 순해지거나 지구상에서 영영 사라지지 않는 한 이와 같은 생활패턴의 변화는 오래도록 미덕으로 받아들여질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생활의 변화는 많은 전통적 산업에 불황을 가지고 왔고 변호사 업계도 최근 수임사건이 눈에 띄게 줄었다. 이같은 상황은 사회적 거리두기 운동에 동참한 시민들간 접촉이 줄어들어 자연스럽게 분쟁이 줄어든 까닭이다.

어쩌면 분쟁의 감소는 공기가 맑아진 것과 아울려 코로나19가 가져온 몇 안되는 좋은 점 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남의 싸움을 대신하는 것이 본업인 변호사 입장에서는 분쟁이 줄어든 상황을 심각한 위기로 받아들일 것 같지만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다. 필자는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한 당분간의 변호사 업계의 불황을 오히려 감사해 하는 편이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필자를 부를 때 이름 대신 '권변'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아졌다. 필자에게 부여되어 있는 누군가의 가족, 누군가의 친구, 누군가의 선생, 누군가의 손님이라는 수많은 역할 중에 유독 변호사라는 직업적 역할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증거이다. 특히 공감에 대한 감수성이 높은 변호사들은 그런 직업적 역할의 강요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호소하기도 하고 필자도 그중 하나이다.

실제로 친목을 위해 함께하는 자리에서도 필자에게 법적 조언을 구하는 경우가 많다. 일에서 벗어나고자 멀리 여행을 가도 마찬가지다. 우연히 만난 사람들 십중팔구는 필자가 변호사라는 것을 알게 되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본인 혹은 하다못해 지인에게 벌어진 사건에 관하여 질문을 쏟아내곤 한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누군가 필자의 직업을 물으면 그냥 사업가라고 말하곤 한다. 필자가 변호사인 것을 아는 순간 그(혹은 그녀)는 떡 본 김에 제사를 지낼 터이고 필자는 그의 제사를 위한 떡이 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시도때도 없는 가랑비 질문공세에 매일 젖어버리는 필자는 바이러스 퇴치여부와 상관없이 지금의 사회적 거리두기가 어느 정도 유지됐으면 하는 개인적 바람이다.

권택인 변호사
권택인 변호사

생각해 보면 사회적 거리두기 운동 이전보다 우리 사회가 비인간적으로 변한 것 같지도 않다. 한국인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우리는 비대면 만남에서 인간의 향기를 찾는 방법을 용케도 찾아낸 것이다. 빠른 속도와 수많은 만남에 길들여져 버린 우리들에게는 적당한 사회적 거간를 두면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성찰의 시간이 오히려 더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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