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오계자 수필가

세상에서 제일 여리고 애달픈 꽃, 상처도 많고 눈물도 많은 꽃, 아지랑이처럼 피어나는 아지랑이 꽃이다.

오랜만에 세분 할머니들을 내 차로 모시면서 인사로 안부를 여쭸다. "밥 때나 기다리고 밥이나 축내는 밥바래기지유 뭐." "어여 갔으면 좋겠어유." "까치도 인자는 하나도 안 용해유."

요즘 어떻게 지내시냐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한숨과 함께 폭발한 그분들의 타령이다. 아침부터 까치가 요란하게 깍깍거려도 반가운 손님은 커녕 개미 한 마리도 오질 않고 편지 조각도 없단다. 이젠 까치도 신통력을 잃어 용하지 않단다. 결국엔 화풀이가 까치에게로 돌아간다. 전화마저도 인색한 자식들은 감싸고 말이다.

홀로 사는 분들은 소리에 민감한지 보청기 없이도 차 소리는 용케 듣는다고 하신다. 바쁜 자녀들이 올 리가 없다는 걸 안다. 무언가 허전하고 기러워서 맹목적인 바라기가 된 것이지 꼭 자식을 기다리는 것만은 아니다. 해가 설핏하면 전화바라기, 배가 불러도 밥바라기라며 시끌시끌하시다가 동네까지 왔다. 어른들은 집으로 가셨지만 가슴 속 깊은데서 우러나온 한숨과 말씀들은 차 안에서 맴돌고 있다. 먹을 것, 입을 것, 누울 곳이 아쉬운 게 아니다. 정이 기럽다.

어른들의 널브러진 시간을 좀 따뜻하게, 감칠 맛나게 조리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얼른 겨울 가기만을 한숨 섞어 기다릴 수밖에 없는 어른들에게도 드디어 봄이 왔다. 하지만 듣도 보도 못하던 전염병 때문에 경로당에도 못 간다. 그나마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전화는 잘 온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전화가 오면, 반가움이 넘쳐서 끼고 있어도 보고 싶을 손자, 까르르 웃는 그 목소리는 밤이 새도록 들어도 진력나지 않지만 "전화요금 많이 나올라 끊어라"하시고, 정말로 끊으면 서운해서 전화통만 쓰다듬는다.

온다고 하지 않았지만 그냥 기다린다. 학창시절에는 '오마지 않은 이가 일도 없이 기다려져…'라는 시구가 가슴에 닿지를 않았다. 쉼을 모르는 시계바늘은 단순히 시간만 돌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움을 모르던 가슴까지 돌려놓아서 이젠 열릴 듯 닫힌 문만 바라본다. 배가 불러도 허전하시고 봄꽃이 핀 밭에 앉아서도 연신 동구 밖으로 관심이 간다.

늙은이는 감정도 가슴도 없는 '마루타' 쯤으로 여기는 아이들, 더 나은 환경 만들어 주려고 그리움, 설렘, 사랑 같은 단어들은 거들떠보지 못한 채 어금니 깨물며 파헤쳐 온 삶이다. 그렇게 삶의 굴곡 다 넘기고 안정이 되자 늦게 가슴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핏종발은 다 퍼붓고 마음만 봄이 온 게다. 아지랑이 같은 그리움, 사춘기보다 여린 설렘을 젊은이의 시선으로는 망상이라고 하려나. 망상도 여유가 있어야 하는 것, 뒤늦게 만난 여유를 어쩌란 말인가.

이 가냘픈 아지랑이 꽃에 물도 주고 정으로 향기를 심어드렸으면 좋겠다. 어느 스님은 달력도 인간이 만든 감옥이라고 표현했다. 19일을 닫으면 20일이 열리고 그렇게 닫고 열어 봤자 4월이란 감옥에서 5월로 이감하고…, 누가 맘대로 벗어날 수 있으랴.

오계자 수필가
오계자 수필가

걸어가는 자나 뛰어가는 자나 달력은 같은 시간에 넘어 간다. 걸어간다고 해서 앞 사람이 삼켰다가 뱉어낸 시간을 먹는 것이 아니다. 조금만 마음의 여유를 찾으면 틈틈이 부모님께 전화 드리는 정성은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정에 기러운 어른들의 아지랑이 꽃에 물을 주는 마음이 기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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