깽깽이풀
깽깽이풀
  • 중부매일
  • 승인 2020.05.21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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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강전섭 수필가

봄결이 깊어질수록 뜨락의 색깔이 짙어진다. 산철쭉 그늘이 드리운 반음지에서 연잎 모양의 잎사귀가 눈길을 끈다. 진초록으로 두른 이파리가 철옹성 모양이다. 내밀한 속살이 보일까 봐 겹겹이 두른 녹색 방패로 가려져 있다. 어쩜 인간의 발길을 거부하는 신성한 소도처럼 자신만의 영역을 차지하며 자리 잡고 있는 듯 보인다.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금원(禁苑) 같이 느껴지기에 더욱 속이 궁금하다. 강렬한 호기심을 유발하며 눈길을 머물게 하는 녹색식물은 뿌리가 황색이라 황련이라 부르는 깽깽이풀이다.

깽깽이풀의 잎사귀는 연잎을 닮아있다. 봄비 내린 뒤 잎에 물방울을 담고 있는 모습은 영락없는 연잎이다. 또 어찌 보면 깽깽이(바이올린)를 옆으로 뉜 모습 같기도 하고, 예전에 여인네들이 규방에서 사용하던 실패를 닮은 듯도 하다. 꽃이 질 때쯤 잎이 오르며 검붉은색으로 자라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진초록으로 변한다. 이즈음에 긴 꽃대는 밀물 때 갯벌이 잠기듯 연잎 사이로 사라진다.

깽깽이풀은 생존을 위한 지혜가 대단하다. 그들도 인간처럼 홀로서기와 함께하기를 병행한다. 보호막인 잎새 속에서 열매 익기를 기다리다 때가 되면 씨앗 주머니를 터트려 참깨 알 만한 씨앗을 날린다. 당분이 함유된 씨앗은 개미들이 좋아해 개미집으로 운반한다. 가끔 개미굴 앞에 깽깽이풀이 자라는 것은 당분이 함유된 흰 막은 먹고 검은 씨앗은 굴 입구에 버려 발아됐기 때문이다. 동물을 이용하여 종족을 멀리 퍼트리는 그들의 생존전략이 기발하다. 식물이 살아남고자 주변 환경에 적응하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모습은 눈물겹도록 처절하다.

모든 생물의 존재는 생존과 죽음으로 귀결된다.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코로나 사태는 기존의 고정관념과 인간의 사고체계와 생활 방식도 무너뜨리고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명제가 무색할 정도로 홀로서기를 강요한다. 남이 나를 지켜주기보다는 스스로 지키는 노력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때로 다른 종족을 이용하기도 하고 자력갱생을 하는 깽깽이풀꽃의 삶의 방식을 보며, 이 힘든 시기를 어떻게 지혜롭게 헤쳐나가야 하는지를 배운다.

식물은 생존을 위한 자기보호 본능이 강하다. 하지만 깽깽이풀처럼 철저히 자신을 보호하는 식물도 없지 싶다. 대부분 식물은 속살을 드러내며 위로 자라는데 깽깽이풀은 속을 감싸며 방패처럼 생긴 잎사귀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그 은밀한 공간엔 씨앗이 익기를 기다리는 새끼손톱만 한 씨방이 있다. 잎사귀가 씨방을 보호하기 위해 주위를 감싸고 있는 듯하다. 왠지 자신을 지키려는 결연한 의지와 굳건한 기상이 엿보인다. 그 모습을 보며 마치 영화 '300'에 나오는 용맹한 스파르타 군인들이 방패를 들고 조국을 구하고자 대제국 페르시아 군대에 맞서는 장면이 떠오르는 건 지나친 비약일까.

깽깽이풀의 명칭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이 꽃을 보면 깽깽이풀이란 이름이 낯설다. 가끔 우리가 부르는 소박한 이름이 그 사람의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꽃은 어느 꽃보다 우아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른 봄에 피는 꽃 중 깽깽이풀처럼 고운 꽃도 드물지 싶다. 꽃을 활짝 피운 모습을 바라보면 볼수록 매력에 빠져든다.

지난 사월 초순, 암향이 진동하는 고매화 밑동 아래서 꽃잔치가 열렸다. 누가 볼세라 소복하게 마련된 연보랏빛 향연이었다. 성냥골같이 앙증맞은 몽우리가 하나둘 올라오더니 환한 꽃 빛으로 세상을 밝혔다. 화장기 하나 없는 소녀의 얼굴처럼 연보랏빛 꽃잎이 부챗살처럼 퍼지는 동살을 받으며 벙싯하게 벌어지는 모습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우주를 품은 꽃봉오리가 열리자 신세계가 펼쳐지는 장엄함이 연출되었다. 환희의 탄성과 신비로움의 극치를 맛보는 짜릿함으로 온몸을 떨었다. 잠시 후 오묘한 꽃 무대가 마련되고, 무희를 자처한 벌들의 춤사위로 꽃잎이 일렁거렸다. 반사되는 연화대 위로 극락정토가 펼쳐지는 듯했다. 며칠 후, 봄날처럼 화르르 피었던 깽깽이풀꽃은 봄눈처럼 허무하게 사라졌다.

날마다 꽃들의 찬가와 이별가를 울리는 봄날이다. 인간의 삶과 죽음이 자연의 순리이듯, 깊어가는 봄길 따라 꽃이 피고 짐도 자연의 이치다. 요즘처럼 하 수상한 시절에 홀로 있는 시간이 길어지며 아름답게 사는 법이 무엇인지를 떠올린다. 과연 인생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비법은 무엇일까. 어느 저명한 미학자의 '인간의 가장 높은 지성은 아름다움에 대한 안목이다'란 말이 울림으로 다가온다. 생존을 위하여 치열하게 버티는 봄꽃을 바라보며 나의 삶을 되돌아본다. 어쩌면, 일상을 거스르지 않고 순리대로 사는 게 행복이리라.

오늘처럼 꽃 진 자리가 눈물겹도록 서러운 날엔 사람이 그립다. 잠시 내 마음을 보랏빛으로 물들이고 떠난 그 꽃을 생각한다. 모든 인간관계의 적당한 거리 두기가 길어질수록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며, 연보라 색채로 수놓던 깽깽이풀꽃의 그 환한 미소가 그립다.

 

강전섭 이사
강전섭 이사

약력
▶2015년 수필과 비평 신인상
▶우암수필문학회, 충북수필과비평작가회의, 청주문인협회 회원
▶충북수필문학회 부회장
▶한국문학세계화추진위원회 충청지부장
▶청주문화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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