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에 새겨진 그 시대 역사… 지역민과 공유하고파"

박권순 서각가
박권순 서각가

[중부매일 이지효 기자] 단원 김홍도, 명필 한석봉, 의친왕 이강, 의병장 한봉수, 남농 허건, 운보 김기창. 이름만 들어도 가슴 설레는 조선 말기부터 현대의 거목 진품들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이 작품들은 서화수집가로, 현재는 서각가로 활동하며 청주문화원 부원장을 맡고 있는 소용(素用) 박권순(65) 서각가가 20년 전부터 손수 모은 소중하고 귀한 작품이다. 최근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입상리에 이 작품들을 전시할 공간을 마련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봤다. / 편집자

박권순 서각가의 쌍목관 내부에 전시된 작품들./이지효
박권순 서각가의 쌍목관 내부에 전시된 작품들./이지효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입상리에 자리한 비닐하우스 3동(594㎡(180평)) 이 소용 박권순 서각가의 작업실이자 전시관이라는 소식을 듣고 반신반의 했다.

비닐하우스라면 보온효과가 커 나무와 종이로 된 작품을 전시하고 보관하기에는 적적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입상리2구 푯말을 따라 들어가니 멀리서도 비닐하우스 3동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포장되지 않은 좁은 도로 때문에 도착하기까지 애를 먹었다.

그렇게 도착한 비닐하우스로 들어가니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쾌적한 온·습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지난해 12월부터 특수 설계로 공사를 시작해 특수필름으로 햇빛을 차단하고 공기 순환을 위한 세심한 설계까지. 직접 작품들을 운반하며 5월 초에 드디어 작품을 관람할 수 있도록 정리가 끝났다.

조금더 정리가 되면 '쌍목관(雙木觀)'이라는 현판을 내 걸 예정이다. 박권순 이라는 이름에 나무 목(木)자가 2개 들어가기도 하고, 나무를 만지는 사람이란 뜻을 함축해 '쌍목'으로 정했다고 했다.

박권순 서각가는 2000년대 초반부터 전시장을 다니면서 눈에 들어오는 작품들을 한 점, 한 점 소장하기 시작했다.

박 서각가는 역사공부를 하면서 예술가들의 발자취를 눈여겨 보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구매로 이어졌다고 한다. 그렇게 처음 구입하게 된 작품은 운보 김기창 화백의 '바보산수' 였다. 이것을 시작으로 현재 소장하고 있는 작품 수만 1천여점.

박권순 서각가의 쌍목관 내부에 전시된 작품들./이지효
박권순 서각가의 쌍목관 내부에 전시된 작품들./이지효

이당 김은호, 남천 송수남, 소산 박대성, 내고 박생광, 의재 허백련 등 동양화의 거물급 작품을 비롯해 한국 서양화단에서 내노라 하는 박수근, 이중섭, 변종하, 오승우, 이수억, 도문희 등의 작품들도 소장하게 됐다. 그림 뿐 아니라 글씨에도 관심이 있었던 그는 초정 권창룡, 고종황제의 다섯번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의 글씨, 의병장 한봉수의 8폭 병풍 글씨, 조선시대 명필로 잘 알려진 한석봉의 글씨까지 소장하게 됐다. 그 당시만 해도 청주에 미술관이 없어 미술관 건립을 꿈으로 삼았었다.

그러던 중 2007년 12월부터 2008년 1월까지 당시 청원군립대청호미술관에서 '소용 박권순 소장품전'이 열려 귀한 작품들이 세상에 나오게 됐다. 10년 후인 2017년 8월 10일부터 23일까지는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에서 '소용 박권순 서각전'을 개최한 바 있다. 이때는 박 서각가의 서각 작품으로만 관람객을 만났었다. 이후 이곳으로 이전하기 전에는 집에 보관만 하고 있어 작품들이 빛을 보지 못했었다.

건설회사 사장이었던 40대 중반부터 그가 서화 수집을 하게 된 계기는 아버지에 대한 추억 때문이었다.

박권순 서각가의 쌍목관 내부에 전시된 작품들./이지효
박권순 서각가의 쌍목관 내부에 전시된 작품들./이지효

어린시절 박 서각가 부친은 민화에 남다른 재능이 있어 곧잘 그려내곤 했단다. 그의 부친이 그린 민화는 호랑이나 꽃 등의 민화였다. 부친은 그림을 그려 이웃에게 나누주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부친이 돌아가시고 군대를 다녀와보니 아버지의 그림이 한 점도 집에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박 서각가는 아버지의 그림은 없고 아버지 그림에 대한 추억만 있어 그것이 늘 가슴 아팠다고 했다.

박 서각가의 막내 동생인 서양화가 박기원씨는 충북대학교 출신으로 중앙미술대전 대상, 2010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로 선정되기도 한 잘 나가는 예술가다.

이렇게 예술가의 피가 흐르는 집안에서 그의 능력도 서각으로 빛을 발하고 있다. 또한 오랫동안 민족통일 충청북도 협의회장을 맡아오며 2002년 김대중 대통령의 훈장을 받기도 했다.

박권순 서각가가 수장고에 보관된 작품들을 보며 분기별로 이곳의 작품들을 전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이지효
박권순 서각가가 수장고에 보관된 작품들을 보며 분기별로 이곳의 작품들을 전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이지효

건설업을 하던 당시 박 서각가는 속리산을 다니면서 반야심경을 자주 써내려갔다. 작품 수집도 많이 하다보니 표구사에 자주 다니게 됐고 그때 권유로 시작한 서각에 재미를 느끼게 됐다.

"쓰는 것보다 서각이 훨씬 재미있었죠. 하나하나 나무를 파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성취감도 있구요. 처음에 독학으로 서각을 배우다보니 서각의 대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공방에 찾아가서 어떤 것을 쓰는지 눈여겨 보고 다시 와서 적용해보는 등 수없이 노력했어요. 그중에 제일은 칼 가는 법부터 터득해야 해요. 그래야 서각을 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서예 작품이 많이 전시돼 있는데 미술대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작가들의 작품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평보 서희환, 우죽 양진니, 고천 배재식, 초정 권창륜 등의 작품과 독립운동 33인 중 1명으로 간송 전형필 선생을 많이 보살펴준 오세창 글씨도 전시돼 있다.

"비닐하우스 하나는 작업실이자 수장고, 또 하나는 전시실, 또 하나는 창고로 사용하고 있지요. 정식 등록 미술관은 아니지만 정말 보기 힘든 작품들을 볼 수 있는 장소가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미술관 건립의 꿈을 이뤘다고 봐야죠."

박권순 서각가의 쌍목관 내부에 전시된 작품들./이지효
박권순 서각가의 쌍목관 내부에 전시된 작품들./이지효

이곳은 문화예술인들이 함께 모여 이야기 하는 사랑방 역할도 하고 있다. 취재차 방문했던 날도 강전섭 청주문화원장을 비롯해 오재경 청주문화원 사무국장, 이택기 청주문화원 이사, 도암 박수훈 서예가 등이 모이는 등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박수훈 서예가는 전시된 작품들을 보며 "작품을 담은 표구만 봐도 연대를 알 수 있다"며 "진귀한 작품들이 많으니 이곳이 잘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특히 평양에서 공수한 묘향산 보현사비 탁본은 물론 추사 김정희가 죽기 3일 전에 쓴 '판전'과 안중근 의사의 '독립'이 박 서각가의 서각으로 남아있다.

묘향산 보현사비는 고려 인종(1109~1146)의 친필이고 보현사비는 김부식이 문장을 짓고 문공유가 글씨를 썼다.

이날 수장고에서 특별히 공개한 눈에 띄는 작품이 있었다. 조선 최고 화가로 잘 알려진 단원 김홍도의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TV쇼 진품명품에도 출연했던 것으로 단원이 30대 초반에 그린 그림으로 알려졌다. 아직 이 작품은 수장고에 보관하고 있는데 곧 전시실로 옮겨져 관람객을 맞을 것으로 기대된다. 또 명필로 알려진 한석봉 친필까지 그 종류와 가치가 대단한 것들로 가득하다.

박권순 서각가의 쌍목관 내부에 전시된 작품들./이지효
박권순 서각가의 쌍목관 내부에 전시된 작품들./이지효

한석봉의 글씨가 쓰여진 종이는 감정사로부터 1598년에 만들어진 종이라고 감정 받은 바 있다. 좋은 종이라 그런지 두드려 보면 가죽으로 만든 장구소리가 났다.

박 서각가는 "이제 시작한 전시로 현재는 서예 작품이 전시 돼 있는데 앞으로 분기별로 작품을 교환해 전시할 계획"이라며 "그림, 설경, 하경, 지역작가 등 시리즈로 공개할 계획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박 서각가는 그가 소장한 진귀한 자료 덕분에 한석봉 기념관에도 초청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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