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재능기부라는 말이 곧잘 쓰인다. 자선 사업이나 공공사업을 돕기 위하여 개인의 재주와 능력을 대가 없이 내놓는 일이 재능기부라고 어학 사전에 되어 있다. 의료, 보건, 문화, 예술, 사회복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행해지고 있다.

"재능기부 하시죠?"

문화계에서도 제법 오가는 말이다. 재능기부에서 주체는 기부자임이 분명하다. 기부자의 선의의 자발적 의지로 이루어질 때 재능기부는 빛난다. 맑은 햇살이나 동심원처럼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치며 퍼진다. 이와 달리 누군가의 요청에 의할 경우 사정이 달라진다. 기부자가 흔쾌히 응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가령 모임에서 사전 양해 없이 누군가 재능 있는 사람을 지목해 일방적으로 재능기부를 부탁하는 일도 흔하다. 재능기부를 요청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은근한 곤경에 빠질 수가 있다. 개인 사정으로 어려울 수도 있고 시간 내기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공개 석상이고 거절할 경우 생길 수도 있는 뒷담화에 대한 두려움, 전체 분위기를 맞춰주려는 마음 등등으로 인해 울며겨자먹기로 수긍하기도 한다. 그럴 경우 재능기부는 일단 기부자에겐 부담이나 족쇄로 작용한다.

더욱이 재능기부가 공짜로 종용되다시피 한다. 물론 공짜야말로 진정한 가치이다. 햇빛, 달, 어머니의 사랑만 봐도 그렇다. 문제는 공짜에 대한 철학이 미흡한 상태에서 문화예술인들에게 재능기부를 강요하다시피하면서 공짜를 당연시하는 태도이다.

문화예술인들은 가난한 경우가 많다. 그러기에 재능기부를 부탁할 경우 금액을 지불해야 한다는 식의 저급한 논리를 펴려는 게 아니다.

우리나라는 공짜에 대한 철학뿐 아니라 돈에 대한 철학도 빈곤하다. 그런 상태에서 섬세해야할 부분들이 서투르거나 거칠게 다루어진다. 문화예술인들은 경제난과 그 돌파 노력으로 인해 정작 중요한 작품 생산에의 몰두가 애로가 있음에도 원치 않는 재능기부에 끌려다니다 보면 작품 생산의 시간도 훼손되고 재능기부 역시 비용이 드는 바 악순환과 씁쓸한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재능기부라는 훌륭한 일 뒤에 가려진 어둑한 그림자이며 우리나라 문화계의 병폐 중 하나이다.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문화예술인들을 어떻게 대우하는 것이 최적인가가 모색되고 실천되어야 한다. 문화예술인들에게 재능을 부탁할 때 마땅한 예의와 더불어 말이다. 그렇지 않을 때 재능기부자의 입장에선 은밀한 폭력을 당한다고 말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방치됨은 물론이고 그에 대한 성찰 자체가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럴듯한 이름과 고상함으로 포장한채 타인의 마음을 고려하지 않고 은근히 밀어붙이는 문화는 당사자에겐 굴욕감과 반감을 일으킨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재능기부를 부탁하는 사람들은 느끼든 못느끼든 폭력을 행사하는 꼴이 된다. 느끼지 못한다면 성찰의 부족이고 다소나마 느낀다면 자기기만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우리나라는 서구의 합리주의, 과학주의 등이 들어오기 전에 고유의 미풍양속이 있었다. 계약, 기브 앤 테이크 같은 서구적 개념과 다른 차원이며 우리나라에 자연스러운 미덕이다. 재능기부가 그릇되게 사용되면 미풍양속에도 흠집을 내는 것은 물론이고 서구적 개념 보다도 못한 처지로 전락하게 된다.

훌륭한 재능기부의 사례들도 풍부할 것이다. 재능기부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행해져온 무수한 것들에 이같은 정밀진단을 할 때가 되었다. 이미 지났다는 느낌도 있다.

재능기부 문화에서 걸러내야 할 독소들은 뿌리부터 걸러내고 지향해야 할 부분은 더욱 풍성하게 이루어나감이 바람직하다.

그 실천만으로도 사회의 활력은 커지고 향기는 고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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