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이난영 수필가

이른 아침 수선떠는 까치 소리가 정겹다. 수련 화분에 목욕하는 멧비둘기 부부의 다정한 모습이 사랑옵다. 작은 정원인데도 새의 종류도 많고 벌, 나비, 달팽이, 개구리, 장수하늘소 등 참으로 다양한 생물이 공존하고 있다. 각자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며 그들에게 많은 것을 배운다.

'야심성유휘(夜深星逾輝)'라고 밤이 깊으면 별은 더욱 빛나듯 겨울은 추워야 제맛이고, 혹독한 겨울을 나야 꽃도 아름다운 줄 알았다. 지난겨울 큰 추위는 없었으나 정원의 꽃들은 어느 해보다도 아름답고 향기롭다.

주차장에서 정원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는 순간 암향부동(暗香浮動)에 동공이 확장된다. 입은 귀에 걸고 코 평수를 넓히며 귀를 쫑긋 세웠다. 부드러운 바람에 꽃잎이 한들한들, 무희를 자처한 호랑나비, 흰나비, 꿀벌들의 춤사위에 함박웃음 지어본다. 아무리 바이러스가 창궐해도 봄은 오고 꽃은 자태를 뽐내니 자연의 섭리는 오묘하다.

봄 가뭄에 시달리던 홍도화, 백도화가 천상수(天上水)를 머금고 작은 꽃망울을 폭죽처럼 터트린다. 봄의 향연이 절정에 이른 것이다. 어린 시절 부풀어 오르는 복숭아 꽃망울에는 꿈이 들어 있고 희망도 사랑도 들어 있었는데.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중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사람의 마음을 즐겁고 아름답게 만드는 꽃은 더 말해 무엇 할까. 먹을 것이 귀한 시절, 꽃도 아름답고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는 복숭아나무는 과수나무가 아니라 가족들의 자존심이고 희망이었지 싶다. 더욱이 인근 마을에서 우리 집에만 있었으니.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고운 빛의 꽃을 피울 때면 꿈, 사랑, 희망도 함께 했다.

세월이 켜켜이 쌓일수록 추억은 애틋한 그리움 되어 간다. 음식도 옛날 어머니가 해주시던 오이소박이와 돼지고기에 마늘 다져 넣고 볶은 고추장이 그립다. 꽃도 외래종의 화려하고 향이 좋은 꽃보다 다알리아, 맨드라미, 백일홍, 복숭아꽃이 더 예뻐 보인다.

그리움에 사무쳐 아침부터 오이소박이와 볶음 고추장을 만들었다. 남편이 더 좋아한다. 오이소박이 한입 베어 물고 풋고추를 찍어 먹으며 엄지 척, 눈을 껌벅거리며 입이 미어지도록 맛있게 상추쌈 먹는 모습이 영락없는 자연인이다.

노자의 도법자연(道法自然) 구절이 생각난다. 도법자연에서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는 말이다. 깊은 뜻은 헤아릴 수 없으나 도는 행복의 길로 해석할 수 있으니 행복의 길은 자연의 법칙을 따르고 본받는 데 있음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 싶다.

정원을 만든 지 5년, 비좁은 공간에 매년 20여 그루 이상 나무를 심다 보니 발 디딜 틈이 없다. 나무가 너무 다닥다닥 붙어 있어 이식해야 한다. 그런데도 봄만 되면 화원을 기웃거린다. 올해는 코로나 19로 힘들어하는 딸의 눈치가 보여 자제하기로 했다. 싱숭생숭 엉덩이가 들썩들썩 참을 수 없다. 화원에 들러 설중매, 구봉화, 노란 울타리 장미를 식구로 맞이하고야 안정을 찾았다.

과유불급이라더니 꽃과 식물이 너무 많다. 워낙 많아 정리정돈이 어려우나 사계절 꽃은 감상 할 수 있다. 노란 바이댄스와 수선화, 분홍색의 금낭화와 앵초, 남색의 무스카리와 아메리칸 블루, 색색의 으아리와 튤립 등 많은 꽃과 식물이 각자의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홍화산사, 서부해당화가 첫사랑처럼 설렘을 준다. 꽃잎이 장미처럼 겹겹이 둘러싸여 있는 능수만첩홍도화와 백도화, 오색도화, 국도화, 남경도 등 꽃복숭아 꽃이 새색시처럼 고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분홍색의 복숭아꽃과 달리 관상용의 꽃복숭아는 색이 매우 다양하다. 매혹적이고 요염한 홍도화, 원숙한 여인 같은 국도화는 황홀 그 자체이다. 오색도화는 한 나무에서 흰색, 빨간색, 분홍색, 복합 색이 오묘한 매력을 풍긴다. 백도화는 말 그대로 순백색이다. 몽우리가 부풀어 오르면 망울망울 눈꽃 송이 같기도 하고, 팝콘 튀겨놓은 듯도 하다. 꽃이 피기 시작하면 아가의 순수한 미소같이 달짝지근한 맛이 난다. 고아한 아름다움에 내 삿된 영혼이 정화된다. 분홍색의 서부해당화와 어울려 꽃 대궐을 이룰 때는 탄성을 자아낼 만큼 환상적이다. "

어린 시절 짙은 회색빛 절망과 어둠으로 채워진 가난이라는 멍에, 공기역학적 이론상 날 수 없는 구조의 호박벌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도화를 보며 희망을 싹틔웠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여고를 졸업하고 공무원이 되어 날개를 단 듯 공직생활을 아름답게 마무리했으니 도화는 꿈이고 희망이었지 싶다.

암향이 채색한 정원에 도화가 봄바람에 휘날린다. 꽃길 만드는 꽃잎에 미움과 욕심은 실어 보내고 감사와 행복은 가슴 깊이 심었다.

이난영 수필가
이난영 수필가

나들이 나온 분마다 정원을 돌아보며 도화가 아름답다. 정원이 예쁘다. 그윽한 향기에 취한다는 등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작은 정원이나마 코로나 19의 한파에 위축된 심신을 달래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뿌듯하다.

'어리석은 자는 멀리서 행복을 찾고, 현명한 자는 자신의 발치에서 행복을 키워간다.' 고 한다. 내가 사랑받은 만큼 내 빛깔과 향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에 정원을 가꾸며 행복을 키운다. 글 쓰는 사람이 글로 행복을 주어야 하나 지금 같은 한파에 얼어붙은 빗장을 풀어주는데 꽃과 식물이 제격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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