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를 기회로 바꾼 '지략'

[중부매일 신동빈 기자]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인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1129일 간의 전쟁은 대한민국이 공산세력의 적화의도를 막아낸 '자유민주주의 승리 전쟁'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에 중부매일은 총 3회에 걸쳐 6·25전쟁 당시 충북의 최대 격전지를 재조명하고 역사적 의의를 살펴본다. /편집자 주
 

최초의 승리, 동락리 전투

충주시 신니면 동락전투 전승지에 세워진 동락전승비 모습. /신동빈
충주시 신니면 동락전투 전승지에 세워진 동락전승비 모습. /신동빈

[중부매일 신동빈 기자] 음성 동락리 전투(현 충주시 신니면)는 6·25전쟁 판세를 바꾸는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 꼽힌다. 패전만 거듭하던 국군에게 첫 승리를 안겼다는 상징적 가치도 있지만 완벽한 전략과 전술, 기민한 전투력, 지역민과의 협조 등을 통해 북한군을 섬멸한 전투로 더 주목받는다.

3일만의 서울 피탈, 한강방어선 붕괴로 연일 패퇴하던 우리군은 낙동강 방어선 구축을 위한 '지연전'을 벌이고 있었다. 적의 남하속도를 늦추는 사이 낙동강에서 전력을 정비, 반격을 준비하겠다는 계산이다. 동락리 전투의 중심이었던 제7연대 2대대 역시 지연전의 임무를 띠고 부용산 인근에서 북한군 고지를 탈환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4㎞ 산길을 쉼 없이 뛰어올라온 (당시)동락국민학교 김재옥 교사로부터 "북한군이 학교로 들이닥쳤다. 그들을 물리쳐 달라"는 신고를 받는다.

신고를 접수한 제2대대장 김종수 소령은 직접 북한군이 주둔한 동락국민학교를 살폈다. 당시 북한군은 '우리군이 인근에서 모두 철수했다'고 오판한 덕에 경계병도 세우지 않은 채 무질서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에 김 소령은 전투를 결심, 동락국민학교를 3개 방향으로 은밀하게 포위할 것을 지시한다. 당시 북한군의 병력규모는 5배가 넘었지만, 김 소령은 승리를 자신했다.

7월 6일 오후 5시, 김 소령의 지시 하에 우리군 300여명은 동락리에 있는 북한군 2천여 명에게 일제사격을 퍼 붙는다. 기습을 당했지만 북한군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이들은 포병을 호위하며 포사격을 통한 반격에 나섰다. 다행히 첫 포탄은 우리군을 빗겨갔다. 이를 본 김종수 소령은 제8중대장 신용관 중위에게 "네가 직접 사격하라. 적탄이 날아오기 전에 단 한발로 포진을 파괴하지 않으면 우리가 전멸한다"며 사격을 지시했다.

적과의 거리는 300m, 신 중위는 신중하게 거리를 측정한 후 포를 날렸다. 결과는 명중. 단 한발로 적의 포진을 무력화시켰다. 반격의 동력을 잃은 북한군은 어쩔 수 없이 기지를 포기하고 인근 산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전투는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졌다. 비무장 상태로 산으로 도주한 북한군은 밤샘 전투 끝에 대부분 사살됐다. 이 전투에서 사망한 우리군은 단 한명도 없었다.

7월 7일 오전 5시 김종수 소령은 동락국민학교에 입성해 전투결과를 확인했다. 북한군의 시신은 1천여구에 달했고, 군 장비도 산처럼 쌓였다.

충주시 신니면 동락전투 전승지에 세워진 동락전승비 모습. /신동빈
충주시 신니면 동락전투 전승지에 세워진 동락전승비 모습. /신동빈

이날 노획된 북한군 장비는 대전으로 옮겨져 일반인들에게 전시됐다. '우리군이 지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라는 사실이 국민들에게 전해지게 된 것이다. 또 북한군 장비의 대부분이 소련제로 밝혀지며, 소련이 이번 전쟁의 배후세력임을 증명하는 증거로 활용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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