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모임득 수필가

살얼음 낀 국물에 면과 무, 채 썬 배와 오이, 달걀 반쪽을 고명으로 올린 냉면이 나왔다. 슴슴하고 시원한 국물이 매력이다. 냉면은 메밀로 주로 만든다. 나는 메밀 향 짙은 면의 평양냉면을, 딸은 쫄깃한 감자 전분 면발의 함흥냉면을 좋아한다.

백석 시인은 '국수'에서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라고 표현하였다. 백석의 시는 오감을 자극한다. 빼어난 토속어로 우리 정서를 노래했다. 음식을 소재로 한 많은 시를 남겼는데 '국수'도 그 중 하나다. 여기서 '국수'는 냉면이다. 평안도에서는 냉면을 국수라고 부른다.

냉면에 식초와 겨자를 두른다. 시인은 국수를 겨울에 얼음이 얼은 시원한 동치미 국에 말아 먹어도 좋고, 얼얼한 고춧가루를 넣어 먹어도 좋고, 싱싱한 산 꿩의 고기를 넣어도 좋다고 한다. 또 식초나 수육을 삶아 넣어도 좋으며 삿방의 절절 끓는 아랫목에서 먹기 좋다고 한다. 겨울밤 국수 한 그릇의 별미이다.

식당 내 앞 탁자에 놓인 냉면에는 산 꿩의 고기는 아니지만 고기 한 첨이 들어있다. 국수에서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라고 했듯이 결코 화려하지 않다. 맛도 요란스럽지가 않다.

난 냉면을 겨울보다는 여름에 먹는 걸 즐긴다. 햇볕이 따가운 것도 있지만 습도가 높아 후덥지근한 날은 살얼음 동동 띄운 냉면이 제격이다. 특히나 좋아하는 사람하고 마주 앉아 얼굴에 땀방울 식혀가며 먹을 때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

선주후면(先酒後麵), 술을 먼저 마시고 면을 나중에 먹는 것을 말한다. 요즘은 냉면을 고기 먹을 때 후식으로 많이 찾는다. 그래서인지 고기 집에서 냉면만 먹는 경우는 별로 없다. 신발 벗고 편하게 앉은 다음 느긋한 마음으로 고기를 구워먹고 그래도 뭔가 허전할 때 시원하게 평양냉면을 먹던가. 매콤한 게 당길 때는 함흥냉면을 찾는다.

매 번 가던 식당이 문을 닫아 아파트 옆 큰 갈빗집으로 딸하고 왔다. 밖에서 보는 것보다 식당은 더 커 보이고 이른 시간인지 손님보다 종업원이 많았다. 냉면 먹기 전, 잘 구워진 고기를 접시에 넣어주는데 쭉 서 있는 종업원을 힐긋 바라보던 딸이 말문을 열었다.

투병하던 남편이 운동으로 하루를 보내던 때, 같이 운동하자고 초등학생 아이들에게 날마다 조른 모양이다. 아빠의 부탁이라 양궁장으로 같이 갔지만 운동이 좋을 리는 없을 터, 그 다음부터는 안 간다고 했다. 그날도 맛있는 거 사 준다고 해서 양궁장 트레킹을 돌고 왔는데 남편은 갈빗집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아빠를 따라가며 딸과 아들이 갈비 먹을 생각에 군침 돌던 찰나 갈비는커녕 달랑 냉면 두 그릇만 시켰으니 어린 마음에 종업원들이 우리 식탁만 바라보는 것 같아 먹는 내내 고개도 들지 못했단다.

모임득 수필가
모임득 수필가

아! 제 아빠하고 왔던 식당에 오니 생각이 났나보다. 누가 들을세라 "아빠 생각나"라고 속삭였지만 갈빗집에서 냉면이라도 먹던 추억을 건져 올렸을 딸. 질긴 면발을 이로 끊으며 천륜이란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것임을, 억지로 잊으려 해야 잊을 수 없는 것임을 느꼈을 것 같다.

냉면을 바라보며 딸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아빠와 딸, 아들 셋이서 먹었던 냉면 두 그릇이었는데, 이번에는 엄마와 딸이 냉면 그릇을 앞에 놓고 바라보기만할 뿐 끝내 입은 열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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