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최한식 수필가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넓이, 보도블록 들어내고 대나무 서너 그루를 심었다. 그곳을 뒤뜰이라 부르고 있다. 뒤뜰로 향한 창으로 댓잎이 보인다. 바람이라도 선뜻 불면 댓잎 서걱거리는 소리 들린다. 선비의 서늘한 결기, 마치 눈 쌓인 겨울의 싸한 바람을 연상케 한다. 살갗을 베일 듯 날선 선비의 결이 느껴진다.

대나무는 선비 나무다. 서재에서 홀로 글을 읽고 쓰다가 눈을 들어 대나무를 향하는 옛 선비의 마음을 따라가 본다. 한때는 스스로의 실력을 자신했을 게다. 과거가 열리고 글제만 맞으면 급제할 수도 있겠다는 심사였으리라. 주변에서도 그만하면 따 논 당상이라고 부추기는 이들이 적지 않았을 게다. 꼭 겪어야 하는 일처럼, 겨울에 감기 앓듯, 한 세월을 그렇게 보내고 이제는 주위에서 별반 기대하지 않고, 본인도 자신감이 사라져 동네 아이들이나 몇 가르쳐볼까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내가 그 선비인양 창밖의 대나무를 바라본다. 흔들리는 가는 줄기 끝이, 푸른빛을 띤 날카로운 바늘처럼 바람 따라 하늘을 긋고 찌른다. 날카로운 끝, 그래, 첨단(尖端)이다. '날카로운 끝'이 '첨(尖)'인데 왜 큰 것 위에 작은 것을 올려 그 뜻을 나타냈을까? 큰 것을 쪼개고 갈아 날카롭게 한다는 것일까, 끝은 작지만 그 근본은 거대하다는 것인가.

가장 앞서 있는 것들은 뾰족한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다른 영역을 뚫고 들어가는 것들은 뾰족하다. 주사바늘, 침, 송곳, 못들이 그렇지 않은가. 뭉툭해서는 뚫고 들어가기 어렵다. 다른 것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맞닿아야 한다. 곧 경계에 서야 한다. 경계에 서는 이들은 긴장을 풀 수 없는 최일선에 있는 이들이다. 그들은 위험하다. 선택과 결과가 정해지지 않아서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분명히 하라고 강요해 왔다. 어느 편인지, 입장이 무엇인지를 밝히라고 한다. 머뭇거리면 회색분자요 위험인물이다. 조류와 포유류사이를 오가는 박쥐취급을 당한다. 분명하면 고민도, 생각할 필요도 없다.

같은 편이 하는 대로 따라하면 되고 먼저 나설 일이 없다. 그 대가로 발전과 성장이 없는 정체와 다툼만 남는다.

안전한 곳을 떠나 경계에 서고, 오감이 날카롭듯, 내 끝을 날카롭게 유지하려 한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다 하늘을 긋고 찌르는 대 끝처럼 살려한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내 몸과 재주가 뭉툭하니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식년시에 문과 선발인원이 33명이었다니 다수의 선비들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기'요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해가 바뀌면 새롭게 마음을 다지고 과거 공고가 나면 책을 다잡고 책상 앞에 앉았을 게다. 효과는 떨어질지 모르나 주변의 자극을 받을 때마다 마음을 다졌으리라.

최한식 수필가
최한식 수필가

방에 들어앉아 뭉툭한 감정과 사상을 바늘처럼 갈고자 책을 꺼내고 사색에 잠긴다. 결심과 실행,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한 없이 흔들리며 갈등을 겪는다.

창문을 여니, 바람에 꽃향기가 실려 올 듯하다. 꽃이 눈에 어리고 내 자신 한 송이 꽃이 되고 싶다. 온전한 준비도 갖추지 못하고 꽃 먼저 피우고 싶은 자신이 밉다. 다시 대나무 가는 줄기 끝에 눈이 간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