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영옥 수필가

이른 새벽, 낯선 전화번호가 뜬다.

자정까지 학원에서 시험 기간에 든 학생들과 씨름을 하고 온 끝에 늦은 시간 잠자리에 들어 깊은 잠에 들지 못한 채 뒤척이다 새벽녘 겨우 잠이 든 순간이었다. 잠결에 무심코 통화버튼을 누른 자신에게 치밀어 오르는 화를 누르며 겨우 전화를 받았다.

"ooo 친구 분 되시죠?" 낮게 드리워진 목소리에 더욱 짜증이 났다. 필시 잘못 걸려온 전화가 분명 하다. 더구나 새벽에 겨우 잠든 내 잠을 깨우다니.

"뭐라고요? 전화 잘못 걸으신 것 아니에요?"

더 들어볼 것도 없이 끊기 버튼을 터치하려는 순간, "아, 여보세요…. 저기, 오oo가 제 어머니예요. 제가 그 분 아들이에요.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어요. 친구 분이라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어 전화 드렸습니다."

그제서야 그 이름 석 자가 귀에 들어온다.

그녀는 중학교 동창이었다. 간간히 한 번 씩 하는 통화 끝에 '언제 밥 한 번 먹자'를 후렴처럼 지껄이며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몇 해를 얼굴 한 번 못보고 시간을 흘려보낸 친구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생각하며 몇 년을 무심히 지내다가도 불현듯 전화해서 어제 만난 것처럼 이런 저런 세월을 한꺼번에 묶어 통화하고 그 끝엔 언제나 '조만간 밥 한번 먹자' 했던 친구다.

보름 전쯤에도 그랬다. 몇 년 만의 통화였다.

별 일 없이 잘 지낸다고 했다. 나이 들어가는 것의 서글픔을 이야기 했고, 아직 결혼하지 않은 자식들의 장래를 걱정했고, 그런저런 수다 끝에 '곧 얼굴 보며 밥 한번 먹자'로 끝을 맺었었다. 그랬던 친구가 오늘 새벽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는 부고를 알린다.

며칠 동안 초여름답지 않게 무더웠던 날씨가 새벽녘부터 후드득 빗방울을 날린다. 그러다 어느새 천둥, 번개, 벼락까지 동반해 요란스럽게 비가 퍼붓기 시작한다. 마치 고요한 머릿속에 '저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의 일갈처럼.

우리들은 모두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밥 한번 먹자, 얼굴 한 번 보자.' 끝내 얼굴 한 번 못보고, 밥 한 끼를 함께 먹지 못하고 그렇게 모든 것들과 이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향을 떠나 우연히도 같은 지역에서 결혼해 살고 있으면서 꿈 많던 사춘기, 그 아름다운 시절을 함께 보냈다는 것만으로도 누구보다도 쉽게 마음을 열고 서로 의지하며 정을 나누었던 친구를 허망하게 떠나보냈다.

김영옥 수필가
김영옥 수필가

운명의 끈에 이끌려 갈 때 가더라도 미루지 말고 얼굴 보며 좀 더 다정하게 보듬어 줄 것을.

살아있는 날 동안 나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들과 따뜻한 온기를 나누며 살 일이다. 내일로, 다음으로 미루지 말고, 당장 오늘 보고 싶었던, 미루어두었던 사람들에게 기별을 보낼 일이다. 그리하여 또다시 바로 약속을 잡고, 얼굴을 대하고 따뜻한 밥 한 끼, 맑은 차 한 잔을 나누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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