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오계자 소설가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

'바램'이라는 노래를 좋아하지만 가사 중에 이 부분이 싫어서 나는 잘 부르지 않는다. 친구들은 반대로 제일 맘에 닿는 구절이라 이 노래를 좋아한단다.

"늙는 것을 왜 부정하고 싶어? 왜 감추고 싶어?" 반문하면 "너는 좀 별난 구석이 있어," 친구의 대답이다. 어쩌면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학창시절에 여성운동가들이 남녀평등을 외치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그것은 열등함을 인정하고 동냥하는 꼴 같아서 자존심을 건드렸다. 힘이 모자라는 대신 섬세한 부분에서 차이점을 보완하면 되고 아이디어 등 실력으로 평등하게 어깨 맞서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내가 별난 것인지 모르겠다.

이뤄놓은 업적이 없어서 늙는다는 것이 자랑스러운 것도 아니지만 부끄러운 것은 더욱 아니다. 당연하고 정상적인 삶의 수순이며 모든 생명은 다 겪는 과정이다. 등 떠밀리어 온 것도 아니며 남 먼저 늙으려고 달려 온 것도 아니다. 누구나 같은 시간에 달력을 넘기고 같이 세월을 먹는다. 젊은이라고 다른 달력, 다른 우주가 있는 것도 아니며 같은 시간을 타고 따라오고 있다. 외면할 길도 아니며 돌아서서 반대로 갈수 있는 길도 아니다.

늙는다는 것 자체가 익어가는 것 아닌가. 또한 이미 다 익어서 추수를 할 때가 되었거나, 아니면 추수를 다 끝낸 상태의 노인(老人)도 있다. 들에 추수를 끝냈다고 해서 무용지물 빈 들이 아니듯 노인이이라고 쓸모없는 뒷방은 아니라는 뜻이다. 무슨 의민가 하면, 담고 있는 지식과 경험에서 얻은 지혜들을 사회에 환원해야 할 시기가 노년기다.

'들판의 아이'의 작가는 자신의 지혜와 지식은 고향마을 정자 나무아래 할아버지들의 이야기 학교에서 수여한 학위라고 했다. 그는 유네스코 연설에서 "한 노인이 숨을 거두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의 모친이 늘 노인 공경과 노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고 강조하며 아들을 키웠기에 노인들이 담고 있는 지혜를 배우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평생 보고 듣고 체험한 경험과 지혜들을 어떤 방법으로 내 자식과 젊은이들에게 전해줄까 고심해야할 중요한 시점이 늙은이다. 중요한 시기에 스스로 늙어가는 것을 한탄이나 하고 있다면 사회적으로 손실은 물론 그야말로 자진해서 뒷방 늙은이로 막을 치는 행위다.

자식들이 제 자식을 낳아 키울 때는 툭하면 전화해서 "엄마 애기 변 색깔이 푸르스름해요. 엄마 애기가 오늘은 잠을 못자고 보채요." 묻는다. 어른들은 울음소리만으로도 원인을 찾아낸다. 이젠 다 자랐다고 엄마의 조언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다. 살아오면서 터득한 지혜들을 차곡차곡 전해줄 좋은 길잡이가 기록이지만 어른들에겐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틈틈이 TV 드라마를 보면서도 자식들이나 손녀에게 "너 같으면 저런 경우 어떻게 해결 할 거야?"묻고 토론한다.

그렇게 문제 해결의 실마리와 대인관계의 경험담과 생각을 말해 준다. 또 일상에서의 지혜도 말해준다. 예를 들면 딸꾹질을 하면 옛 어르신들은 무조건 왜 거짓말 했느냐고 윽박지르거나 먹지 않은 무언가를 먹었다고 우긴다. 아니라고 흥분하다보면 딸꾹질이 멈추어져 있다. 흥분해서 폐가 확장되면 횡격막을 밀어주기 때문이다. 조상들의 딸꾹질 치료하는 지혜이다.

오계자 수필가
오계자 수필가

사소하지만 그렇게 노인들이 담고 있는 일상의 지혜는 그야말로 값진 도서관이 될 것인데 왜 늙어가는 것을 한탄하며 스스로 뒷방을 찾는지 아쉬운 마음이다. 하루하루 보람되게 엮으며 스스로 자신을 잘 경영해서 사회에 보탬이 되는 당당한 노인이 되면 좋겠다.

'우린 늙어가는 만큼씩 열매도 익어가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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