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2010년 10월 7일은 봉오동전투 승전 100주년이 되는 매우 뜻 깊은 날이다.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6~7일 만주에 주둔 중이던 홍범도, 최진동(일명 최명록), 안무 등이 이끄는 대한군북로독군부의 독립군 연합부대와 신민단 예하 이흥수, 한경세의 신민단 독립군 1개 중대가 연합한 한국 독립군 1천200여 명이 중국 지린성 허룽현 봉오동에서 일본군 제19사단의 야스카와 지로가 이끄는 월강추격대대와 니히미 지로가 이끄는 남양수비대 예하 1개 중대 병력 500여 명과 싸운 전투를 말한다.

상해임시정부의 발표에 의하면,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 측 피해는 전사자 157명·중상 200명·경상 100명이고, 한국인 독립군 측 피해는 전사자 4·중상 2명에 불과해 한국 독립군이 대승을 거두었다고 한다.

봉오동 전투에서 한국 독립군이 대승을 거둔 요인은 일본군 제19사단의 작전 실패로 일본군이 서로 총을 겨누고 발사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벌어지고, 한국 독립군이 봉오동의 지형과 기후 조건을 잘 이용해서 일본군을 봉오동의 험준한 골짜기로 유인해 선제 총공격을 감행하여 일시에 일본군을 섬멸했기 때문이다.

봉오동전투는 3·1운동 직후 만주에서 집결한 독립운동 세력이 '독립전쟁의 해'를 선포하고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벌여 사실상 첫 대승을 거두어 한국 독립군의 사기를 크게 올리고 병력보강과 군비확충에 활력을 주어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의 영웅 여천 홍범도 장군은 1868년 8월 27일 평안북도 자성의 남양홍씨 가문에서 가난한 농부 홍윤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7일 만에 어머니가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하여 동네 부인네들로부터 젖을 얻어먹으며 자랐고, 또 9살 되던 해에는 부친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나 고아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정규교육도 받지 못하고 머슴, 평양감영 나팔수, 제지소 노동자, 금강산 신계사 지담대사 상좌승, 소작농, 포수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의병과 독립군이 되어 국내외에서 수많은 항일무장독립투쟁을 전개하여 우리 조국 대한민국이 일제로부터 독립을 하는 데에 많은 공헌을 했다. 그리고 홍범도 장군은 사학자가 아니면서도 운초 계연수 선생이 1911년 '환단고기'를 발간할 때에 송암 오동진 장군과 함께 출판비를 지원하여 오늘날 재야 민족사학자들이 국사광복운동을 전개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그런데 스탈린이 1937년 연해주의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는 바람에 69세의 홍범도 장군은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로 강제이주된 이후 야간에는 고려극장의 수위로 일하고, 주간에는 정미소의 근로자로 외로운 삶을 살다가 조국의 광복을 바로 눈앞에 둔 1943년 10월 25일 76세를 일기로 한 많은 일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홍범도 장군의 부인은 일본군에 붙잡혀 고문으로 숨지고, 장남은 전사하였으며, 차남은 전투 중에 병사했다. 그래서 혈육 한점 남기지 않은 채 모든 것을 조국 해방에 바쳤다.

그리하여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62년에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그리고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에는 1982년 카자흐스탄의 한글신문 '레닌기치' 기자들과 한인들이 중심이 되어 홍범도 장군의 흉상과 3개의 기념비를 세웠다. 또한 말년에 거주하던 집은 크질오르다의 역사기념물로 지정되었고, 집 근처의 거리는 '홍범도 거리'로 지정되었으며, 카자흐스탄 국립 고려극장에서는 해마다 연극 '날으는 홍범도 장군'을 공연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3·1독립만세운동 101주년을 맞이하여 문재인정부가 지금도 카지흐스탄의 크질오르다 묘소에 잠들어 있는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봉환하여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한다고 한다.

한편 2019년에는 봉오동전투를 소재로 영화가 제작되었고, 2020년에는 봉오동전투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기념우표가 발행되었으며, 2020년 6월 7일 오전에는 전쟁기념관 평화광장에서 봉오동전투 승전 100주년 기념식이 '승리 또 승리'라는 주제로 개최되었다.

전 독립기념관장인 김삼웅 선생은 여천 홍범도 장군의 생애와 업적의 역사적 의의를 다음과 같이 잘 평가하고 정리하여 한민족 모두에게 많은 교훈을 안겨주고 있다.

'조선왕조의 온갖 혜택을 입었던 왕족·대신·고위 관료들이 친일파가 되어 민족을 배신할 때에 홍범도 장군은 미천한 가문 출신이었지만 산포수, 의병, 독립군, 빨치산 대장이 되어 민족해방투쟁에 모든 것을 바친 혁명가였다.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시인·문학평론가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시인·문학평론가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항일 무장투사들의 존재로 인해 항일독립운동이 문약에 빠지지 않고, 한민족의 당당한 패기를 지키게 되었다.'

봉오동전투 100주년을 계기로 모든 국민들이 홍범도 장군의 희생적인 애국애족 정신을 창조적으로 계승하여 자주 국방을 더욱더 튼튼히 하고, 코로나19로 당면한 국가적 위기를 슬기롭게 잘 극복하여 우리 조국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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