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미술품 되살리는 재창조자의 세계

500여 종의 다양한 안료 설치 전경
500여 종의 다양한 안료 설치 전경

[중부매일 이지효 기자] 국립현대미술관(MMCA, 관장 윤범모)이 그동안 세상에 없던 청주(미술품수장센터, 이하 청주관)만의 특징을 살린 특별한 전시를 개최한다.

10월 4일까지 청주관에서 진행되는 보존과학을 소개하는 상반기 기획전 '보존과학자 C의 하루 (Conservator C's Day)'가 바로 그것이다.

그동안 보존과 관련된 전시라면 미술품 복원 전 후의 비교가 많았었는데 이번 전시는 그 사이에 일어나는 수많은 감정과 과정을 통해 보존과학자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전시라 할 수 있다.

보존과학자의 도구
보존과학자의 도구

'보존과학자 C의 하루'는 다소 드러나지 않았던 보존과학의 이야기를 전시를 통해 소개한다. 전시제목의 'C'는 보존과학자를 칭하는 '컨서베이터(Conservator)'와 '청주(Cheongju)'의 'C'를 가리키기도 하고 동시에 삼인칭 대명사 '-씨'를 의미하기도 한다.

미술작품은 탄생의 순간부터 환경적, 물리적 영향으로 변화와 손상을 겪지만 보존과학자의 손길을 거쳐 다시 생명을 얻는다. 탄생과 소멸이라는 일반적인 생로병사 과정에서 보존·복원을 통해 생명을 연장하는 작품의 생로병생(生老病生) 과정인 것이다. 현대미술로 보면 이것은 물리적 생명 연장을 넘어 작품에 새로운 의미를 불어넣는 과정과도 같다. '보존과학자 C의 하루'는 이 과정의 중심에 있는 보존과학자를 전시의 한 축으로 삼아 특히 가상의 인물인 '보존과학자 C'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방식으로 보존과학에 접근한다. 기획자의 시각으로 바라본 보존과학자의 일상을 인문학적으로 접근해 작가와 작품, 관객 등 다양한 관계 안에서 보존·복원을 수행하는 한 인물의 일상과 고민 등을 시각화한다. 이번 전시는 현대미술의 보존·복원이라는 측면에 집중해 보존 '과학'을 문화와 예술의 관점으로 들여다보고자 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보존과학자의 도구들(왼쪽)과 니키 드 생팔의 검은 나나(라라)(1967) 설치 전경
보존과학자의 도구들(왼쪽)과 니키 드 생팔의 검은 나나(라라)(1967) 설치 전경

전시는 상처, 도구, 시간, 고민, 생각 등 보존과학자의 하루를 보여줄 수 있는 주요 단어를 선정해 '상처와 마주한 C', 'C의 도구', '시간을 쌓는 C', 'C의 고민', 'C의 서재'라는 5개 주제로 나누어 구성됐다. 전시 공간을 따라 이동하며 상상과 실재 사이에서 구성된 보존과학자 C의 일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구조이다.

'상처와 마주한 C'는 일상적으로 작품의 물리적 상처를 마주하는 보존과학자의 감정을 공감할 수 있는 공간이다. 텅 빈, 어두운 공간에는 사운드 아티스트 류한길의 작품 소리만이 울려 퍼진다.

이갑경 작 격자무늬의 옷을 입은 여인 복원과정 영상
이갑경 작 격자무늬의 옷을 입은 여인 복원과정 영상

'C의 도구'는 실제 사용되는 보존과학 도구와 안료, 분석 자료, 재해석된 이미지 등을 함께 전시해 보존과학실의 풍경을 재현한다. 청주관 보존과학실의 냄새를 채집해 유리병에 담아 실제 냄새는 나지 않지만 시각적 설치 효과로 냄새를 상상할 수 있게 한 작가 김지수의 작품은 흥미롭다. 정정호 작가는 보존과학실의 각종 과학 장비를 새로운 각도에서 주목한 사진 작품을 소개한다. 주재범 작가는 이미지의 최소 단위인 픽셀을 활용한 애니메이션 영상으로 보존과학자의 하루를 형상화한다.

'C의 도구' 공간에서는 이 외에 수백 종류의 안료와 현미경 등 광학기기, 분석자료 등이 함께 배치돼 보존과학자의 현실을 함께 보여준다. 특히 한국 근·현대 서양화단을 대표하는 구본웅(1906-1953)과 오지호(1905-1982)의 유화작품을 분석해 1920~80년대 흰색 안료의 성분 변화를 추적한 분석 그래프와 제조사에 따라 물감의 화학적 특성이 다름을 시각화한 3차원 그래프는 보존과학에 있어 '과학'의 영역을 보여준다. 특히 X선 조사법을 통해 구본웅의 1940년 작 '여인'에서는 집, 담장으로 추측되는 이미지가 발견됐고, 오지호의 1927년 작 '풍경'에서는 숨겨진 여인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이갑경 작〈격자무늬의 옷을 입은 여인〉(1937)과 복원과정을 찍은 영상이 함께 소개되고 있다.
이갑경 작〈격자무늬의 옷을 입은 여인〉(1937)과 복원과정을 찍은 영상이 함께 소개되고 있다.

'시간을 쌓는 C'에서는 실제 보존처리 대상이 됐던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 실물과 복원의 기록들을 담은 영상을 함께 전시한다. 야외전시로 인해 표면의 변색과 박락 등 손상이 심했던 니키 드 생팔(1930-2002)의 '검은 나나(라라)'(1967)의 복원 과정을 통해 현대미술의 보존 방법론을 소개한다. 또한 신미경의 '비너스'(1998) 등 비누 조각 작품을 통해 현대미술의 재료적 특성을 확인하고, 다각도로 실험해 보존·복원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1989년 보존처리가 이루어졌던 이갑경(1914-미상)의 '격자무늬의 옷을 입은 여인'(1937) 은 2011년 재보존처리 됐는데, 이것은 보존의 과정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후대에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외에도 이서지(1934-2011), 육명심, 전상범(1926-1999) 등 작품 분야별 보존·복원에 관한 기록을 영상으로 소개한다.

'C의 고민'에서는 작품을 보존·복원하는 과정 중에 보존과학자가 겪는 다양한 고민을 시각화 한다. 특히 TV를 표현 매체로 사용하는 뉴미디어 작품들의 복원 문제에서 새로운 기술과 장비의 수용 문제를 다룬다. 우종덕 작가는 최근 이슈가 되어온 백남준 作 '다다익선'(1988)의 복원 문제와 관련한 3가지 의견을 영상 설치 작품으로 소개한다. 한 명의 인물이 3개 채널로 나뉘어 각기 다른 의견을 이야기하는 영상은 한 사람의 보존과학자가 복원을 수행하기까지 고민하며 방향성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정정호 작 보존도구 시리즈 2020 설치  전경
정정호 작 보존도구 시리즈 2020 설치 전경

'C의 서재'는 유동적인 현대미술을 보존·복원하는 보존과학자의 연구 공간이다. 과학자이면서 동시에 인문학적 지식 배경을 갖춘 보존과학자 C의 감수성을 보여줄 수 있는 소설을 비롯해 미술, 과학 도서 등의 자료들을 함께 배치했다. 'C의 서재' 공간 구조는 제로랩의 디자인으로 완성됐다. 제로랩은 실험실의 느낌을 주는 아연 도금 강판을 소재로 서재를 디자인해 규칙적 공간 속에서 불규칙적인 자료들을 해석할 수 있는 다층적 공간으로 완성했다. 이 공간에는 또한 前 국립현대미술관 보존과학자인 강정식, 차병갑, 김겸의 인터뷰 영상을 소개해 보존과학자로서의 일과 삶을 다각도로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보존과학자 C의 하루'전은 유튜브 채널(youtube.com/mmcakorea)을 통해 '학예사 전시투어' 영상으로도 만날 수 있다. 전시를 기획한 김유진 학예연구사의 설명과 생생한 전시장을 담은 녹화 중계로 7월 2일 오후 4시부터 30분간 진행된다. 중계 후에도 유튜브를 통해 영상을 계속 볼 수 있다.

제로랩, 〈C의 서재〉(2022) 설치 전경
제로랩, 〈C의 서재〉(2022) 설치 전경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보존과학분야의 대중화와 과학자의 다양한 고민들을 시각화한 흥미로운 전시"라며 "청주관의 특수성을 보여주는 특이한 전시로 실재와 상상의 경계 사이에서 보존과학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청주관은 미술관 홈페이지 사전예약을 통해 관람이 가능하다. 앞으로 정말 보존과학자가 된 것처럼 보존과학자의 가운을 입고 전시에 들어가는 이벤트도 주2회 실시할 예정이고 분석 장비를 활용한 체험 프로그램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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