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영화 서편제를 보면서 서편제 소리에 저리도록 끌리던 여운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런 내게 충청도의 판소리가 별도로 있음이 알려진 게 며칠 전이다. 중고제 판소리라고 불린다는 것도.

이야기를 들려준 국악 전문 교수는 동편제와 서편제, 중고제 판소리 역시 비교해 주었다. 동편제가 남성적 소리라면 서편제는 애절한 여성적 소리이다. 중고제 판소리는 담백하고 꾸밈이 적다. 자연이 담길 여지가 더 많다는 말에 끌림이 더욱 깊어졌다. 중고제 판소리가 동편제와 서편제보다 발생적으로 먼저라는 말도 나를 흥분시켰다. 그런데 그 다음의 이야기가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그처럼 매혹적인 중고제 판소리가 단절의 위기에 처해있다는 것이다.

충청의 소리로서 내포제 시조가 있음도 그날 알게 되었다. 시조는 지역별로는 서울, 경기의 경제, 충청도의 내포제, 경상도의 영제, 전라도의 완제로 나눠진다. 이처럼 다른 지역의 시조들과 변별되는 충청의 시조임에도 그 역시 고향에서조차 버림받고 있는 것이다. 내포제 시조는 1992년에 충남무형문화재 17호, 2004년에 충북무형문화재 14호로 지정되었음에도 충북의 경우 예능보유자 한우섭 타계 후 전승이 단절되다시피 되어 있다. 안타까움과 분노가 뜨거움,아픈 마음과 뒤섞여 흘러갔다. 다른 곳도 아닌 고향에서 치명적인 문화 충격을 받은 것이다.

구조주의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가 문화에 우월이 없음을 밝힌 것이 수십년 전이다. 문화의 다양성이란 말은 일상에서도 곧잘 들린다. 글의 문체만 해도 간결체, 만연체, 강건체, 우유체, 건조체, 화려체 등이 있다. 그 하나하나가 다 고유의 특색이 있다. 그 모두가 어우러져 문학의 숲을 이룬다. 그럼에도 이럴 수 있는가? 문화의 시대라고 일컬어지는 한 복판에서, 백주대낮에 말이다. 문화 우월주의와 아전인수도 배격되어야 하지만 자기 폄하는 금물이다. 문화는 독자성과 다양성으로 이루어진 스펙트럼이다.

지상의 그 어느 문화와 마찬가지로 충청의 문화 역시 충청도만의 고유성에서 나온 것이다. 그 이면엔 상식적으로 보이는 것들보다 깊은 심연들이 녹아 있다. 그 깊은 퇴적층에로의 여행은 고정관념을 깨야만 갈 수 있는 멋진 모험이자 인문학적 탐사이다. 중고제 판소리와 내포제 시조는 그 두터움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왔다. 충청도인들은 옛부터 그런 소리와 가락 속에서 자라왔다. 충청도인들에겐 그 문화적 밈이 풍부하다. 일제 강점기 시절에 동편제의 호쾌함이나 서편제의 애절하고 슬픈 맛은 민초들의 가슴으로 파고들 수 있었다. 중고제 판소리는 밋밋하고 멋쩍어서 그런 소리들에 밀렸다. 중고제 판소리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없어서 전승이 단절 위기에 있다는 말도 있다. 충청의 소리가 충청도에서 버림받음에 대한 이유에 속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문화는 수용자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만은 아니다. 어떤 문화든 그 내적 미와 결이 적절하게 해석되면 수용자의 시각도 변한다. 뒤샹의 샘을 포함해 그러한 예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으며 지금은 그런 시대 흐름 속에 들어선지도 오래 되었다. 일제 강점기완 시대 정신이나 문화 감각, 문화에 대한 이해 등 숱한 것들이 천양지차로 변해 있다.

동편제와 서편제가 각각의 특색으로 빛난다면 중고제 판소리엔 적요한 대청에 부는 바람의 맛이 있다. 내포제 시조엔 치장이 많지 않은 충청의 마음이 배어 있다. 우리나라 소리의 스펙트럼에 당연히 당당하게 들어가야 할 충청의 소리가 그렇게 되지 못한 비극에 대해 국민들로서는 알기가 쉽진 않다.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그 가치를 평가해서 포지셔닝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혹시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에 쌓여 봐야할 가치에 눈을 감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문화 해석 및 문화 행정을 제대로 해야함에도 직무 유기를 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 말이 맞다면 충청의 소리가 제대로 재평가 되도록 비록 늦었지만 책임자들의 대대적인 반성과 더불어 수정 작업이 절실하다. 문화 시대를 사는 국민을 위해 이제라도 마땅히 취해야할 도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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