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류시호 시인·수필가

마을 학교에서 한국사를 가르치다 보면 여섯 가야를 이끌던 김수로 왕이 나온다. 중국 진수의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당시 한반도에 78개 나라가 있었고, 남쪽 마한, 진한, 변한 중 변한에 있던 가야가 크게 번성을 했다. 얼마 전 국립중앙박물관의 '가야본성, 칼과 현' 전시회를 본후 가야의 본거지 김해 금관가야를 방문했다. 김해시 중심가에 있는 왕릉(王陵)은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 무덤 납릉(納陵)이다. 수로왕 이야기는 일엽 스님의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전하고 있다.

고준환 경기대 명예교수의 '고주몽 성제에서 광개토 대제까지' 책을 보면, 불교가 고구려나 백제보다 먼저 가야에 유입된 것은,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옥과 오빠 장유화상이 가져온 파사석탑(婆娑石塔)을 통해 알 수 있다. 불교 문화가 국제결혼을 통해 일찍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한국인의 재발견 칼럼을 쓴 동국대 윤명철 명예교수의 글을 보면, 가야의 원래 이름은 '구야' '가라(加羅)'였지만 불교의 영향을 받은 듯한 '가야'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같은 불교용어 사용은 초기에 불교가 유입되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가야본성, 칼과 현' 전시회에서 철의 왕국 가야 국가들이 520년간 힘과 조화로 공존하고 화합하는 역사를 보았다. 1부 전시실에서는 '공존'을 설명하고 수백 년간 공존을 지킬 수 있었던 '힘'에 대해 소개했다. 3부 전시실은 '힘'이라는 주제로 가야가 힘의 원천인 철을 통해 어떻게 존속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었다. 국보 275호인 '말 탄 무사모양 뿔잔'을 비롯해 고사리무늬 철갑옷, 말 갑옷 등은 철의 나라임을 나타낸다. 철을 자유롭게 다뤘던 가야의 제철 기술은 대단한 신기술이었다. 소설가 김훈은 현의 노래에서 '쇠를 단단하게 걸러내고, 날을 세우는 대장장이 기술은 가야가 으뜸이었다.'고 표현했다.

윤명철 교수의 한국해양사 책을 보면 가야는 초기의 '디아스포라(고국을 떠나는 사람·집단의 이동)' 단계를 넘어 일본 열도에 조직적으로 진출했다. 때문에 일본 열도의 건국신화와 지명 등에 가야와 연관된 흔적이 많고, 가야국은 해양 무역을 통하여 일찍부터 일본의 일부를 지배한 것 같다.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가 패권을 다투었지만, 가야는 공존을 추구하며 버티었다. 작은 나라가 강할 수 있었던 것은 철을 다루는 첨단기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야 6개국은 철로 칼과 갑옷을 만들고, 우륵의 가야금으로 하모니를 만들어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그래서 가야국들은 칼과 현으로 다양성과 독자성을 인정하고 공존했다.

류시호 시인·수필가
류시호 시인·수필가

김해의 김관가야 유적과 유물, 왕릉, 작년에 문화기행으로 갔던 고령의 대가야,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 전시회를 통해 역사와 문화에 대해 배울 수 있어 보람찬 날들이었다. 전국에 흩어진 고대와 중세시대 선조들의 삶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저력을 알게 되고, 인문학을 통해 우리 고유문화에 대한 믿음과 힘을 얻었다. 귀중한 인문학 지식은 삶의 양식이 되고 행복하게 해준다. 우리 모두 행복은 아주 가까운 곳 우리 마음속에 있음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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