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지났어도 목숨 바쳐 처절하게 싸웠던 기억 생생"

6·25 참전용사인 지현규씨가 1951년 당시 전우들과 찍었던 사진을 펼쳐보이고 있다. /신동빈
6·25 참전용사인 지현규씨가 1951년 당시 전우들과 찍었던 사진을 펼쳐보이고 있다. /신동빈

[중부매일 신동빈 기자] '1134163' 19세의 나이로 자진 입대해 부여받은 군번, 7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머릿속에 또렷하게 새겨진 숫자다.

1950년 6월 25일, 대전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던 지현규(89)씨는 학교로부터 무기한 휴교 통보를 받는다. 전쟁이 났으니 집으로 돌아가 연락을 기다리라는 것이다. 청주가 집이였던 그는 바로 대전역으로 갔다. 역에는 군복을 입고 서울행 열차를 기다리는 군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진짜 전쟁이 났구나 실감했어요. 그 길로 피난길에 올랐는데, 주요거리마다 군인들이 징병을 했어요. 저도 붙잡혀 갔는데, 학생증이 있어 풀려났죠. 이후 대구까지 피난을 왔는데,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자진입대 했습니다."

자진입대 후 대구 계성고등학교에서 훈련을 받던 지씨는 UN군(3사단 65연대)에 편성되며 일본 규슈로 넘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48일간 군사훈련을 마친 그는 1134163이라는 군번을 부여받는다. 그리고 3일 후 시모노세키로 이동, 미군 군함에 승선한다.

1950년 11월의 어느 날,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도착한 곳은 북한 원산이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의 여세를 몰아 북진하던 한국군을 돕기 위한 전략이었다.

"군함에서 내린 그 순간부터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됐어요. 낮에는 탱크를 앞세워 전진하고, 밤에는 북한군의 기습을 피해 후퇴하는 일을 반복했죠. 한 달간 씻지도 못하고 싸웠는데 갑자기 중공군이 개입했다는 얘기가 들렸어요. 그 길로 밀리고 밀려 흥남까지 갔죠. 정신없는 와중에 탱크가 큰 빌딩으로 들어가기에 여기가 어딘가 했는데, 날이 밝고 보니 제가 타고 온 군함이었어요."

지씨가 탄 배는 흥남대철수의 주역인 빅토리아호였다. 1950년 12월 22일, 군함을 타고 남하한 지씨는 전라남도 여수에서 하선한 후 다시 서울 재수복 전투에 참여한다. 이후 그는 한국군 20사단 61연대 1대대 2중대로 편입해 휴전선 인근에서 고지전을 펼친다.

"양구에 있는 M1고지에서 중공군과 맞선 적이 있어요. 끝도 안 보이는 중공군을 겨우겨우 밀어내면, 그만큼의 숫자가 또 오고, 또 오고 했어요. 인해전술이죠. 중공군은 무기 없이 맨몸으로 오다가 죽은 동료들 시체에서 총과 칼을 주워들었어요. 끔찍했죠. 시체를 밟고 코앞까지 밀려온 중공군과 싸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이 오싹합니다."

1951년 7월까지 고지전을 펼친 지씨는 UN군 정기훈련과정을 이수한 경력을 인정받아 행정업무를 전담하게 된다. 그렇게 2년여 간의 시간이 흐르고 지씨는 휴전일을 맞게 된다.

"1953년 7월 27일 오전부터 끊이지 않던 포탄소리가 오후 10시(휴전협정 효력 개시)부터 멈췄어요. 부대 밖을 나와 보니 트럭 헤드라이트가 밝게 켜져 있었죠. 그때서야 정말 끝났구나 실감했습니다.

전쟁기간동안에는 부대 위치와 이동 동선 노출을 막기 위해 야간에는 차량 라이트를 끄고 운행해 왔기에, 라이트를 켜고 돌아다니는 차량은 지씨에게는 생경한 모습이었다.

"이제 더 이상 사람이 죽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했던 기억이 납니다."

19살의 나이로 전쟁에 참전했던 지씨는 이제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혈기왕성한 사진 속 청년의 손가락은 휘어있었고, 눈가에 주름도 가득했다.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6·25참전용사들이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길어야 10년 더 사는 이들을 위해 국가가 조금만 더 관심 갖고 보살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국가를 위해 목숨을 내던졌던 그들의 희생과 용기를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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