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최시선 수필가·광혜원고 교장

바야흐로 생명의 계절이다. 내가 사는 미호천에도 초록이 시나브로 번지더니 온 강변이 푸른 물결이다. 미호천은 탁 트여 있다. 소로리 볍씨가 이곳에서 발견된 것을 보면 유서 깊은 곳이다. 양쪽으로 자전거 도로가 나 있다. 난 이 도로를 틈나는 대로 달린다. 저녁에도 달리지만, 주말에는 더 멀리까지 간다.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내가 이 길을 달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마음이 깨끗해지고, 덤으로 운동까지 되기 때문이다. 넓은 하늘엔 구름이 두리둥실 떠간다. 너털웃음 같은 하얀 구름이다. 바람은 시원하고 물결은 빛난다. 잠깐 옆을 본다. 와, 갈대다. 갈대가 변신하고 있다! 누런 갈색으로 그리도 무성하게 번져서 바람 부는 봄을 온몸으로 버티어내더니, 이제는 푸른 옷으로 갈아입고 있다.

나는 3월 말부터 이 길을 달렸는데, 그때는 푸른 물기란 없고 바짝 말라버린 그야말로 죽어버린 갈대였다. 긴 겨울을 나고 이제는 쓰러질 힘조차 없는 백발노인 같았다. 키는 멀대처럼 크고 허리는 구부러져 바람에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갈대숲에 새로운 힘이 솟고 있었다. 갈대숲 바닥에서 파릇파릇한 싹이 돋더니, 이제는 푸른색으로 치어 오르고 있다. 대변신이다. 죽은 줄만 알았던 갈대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 아, 경이롭다. 푸른 갈대의 생명은 어디서 오는가! 이는 죽은 자의 부활이요, 생사윤회가 아닐 수 없다.

미호천 강변은 그야말로 갈대숲이다. 너무도 아름답다. 갈색으로 누렇게 물결치는 모습을 보고는 탄성을 질렀다. 뭐라 할까. 세월을 열심히 살다가 이제는 멋지게 늙어버린 노신사가 황혼에 탱고를 추는 듯한 자태라고나 할까. 흘러간 노래, '갈대의 순정'이 생각난다. 사나이 우는 마음을 그 누가 알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의 순정 얼마나 오래된 노래인가. 1967년, 남자의 구수한 저음 목청으로 박일남이 노래해 히트 친 노래다. 언젠가 어느 행사에서 갈대의 순정을 하모니카로 연주했는데 꽤 박수를 받았다. KBS 가요무대에서 순위를 매겼는데 갈대의 순정이 상위에 있는 것을 보았다. 누구나 좋아하는 국민가요란 뜻이다.

갈대는 쉼 없이 자랄 것이다. 나는 지켜본다. 죽어 말라버린 갈대가 어떻게 사라지는지. 가만히 보니 푸른 줄기가 올라오는 대로 차츰차츰 없어지고 있다. 그냥 고개가 꺾인 채 고꾸라져 있든가, 푸른 갈대에 가려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노병은 사라질지언정 죽지 않는 것처럼. 단오가 되면 푸른 갈대는 절정을 이루리라. 이쯤 되면 건실한 갈대를 베어서 갈대청을 뽑아 올릴 수 있으리라. 이 갈대청은 '대금청'이라고도 한다. 대금을 불 때 울림판 역할을 한다. 이 대금청이 떨어대면 심금을 울린다. 슬픔은 극에 달하고, 영혼은 씻기어 편안해진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만파식적의 영험이 다 이런 것이다.

갈대, 그대의 변신은 무죄다. 왜냐하면, 화려한 부활이요, 생명의 순환이기 때문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미호천을 달리지만, 언젠가는 저 갈대처럼 누렇게 익어 바람에 서성이다가 푸른 갈대에 몸을 내어 주리라. 그러니, 인생은 갈대다.

최시선 수필가·광혜원고 교장
최시선 수필가·광혜원고 교장

 

약력
▶2006년 월간 문예사조 수필 등단
▶CJB 청주방송 제5회 TV백일장 수필 장원
▶한국문인협회·충북수필문학회·청주문인협회 회원
▶저서 '청소년을 위한 명상 이야기', '학교로 간 붓다', '소똥 줍는 아이들', '내가 묻고 붓다가 답하다', 수필집 '삶을 일깨우는 풍경소리'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