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칼럼] 권택인 변호사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과 닮은 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부부는 닮는다는 속설이 있는데, 이 역시 자신과 닮은 사람을 선호하는 본능의 결과물로, 부부로 살면서 닮아진 것이 아니라 닮았기에 부부가 되었다고 설명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를 입증하듯 헐리우드 유명 커플 배우들 중 마치 오누이처럼 닮은 경우가 종종 있기도 하다.

필자도 사람이기에 닮은 것에 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생각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그(혹은 그녀)와의 대화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특히 책을 읽는 중 그 작가와 나의 생각이 같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그 책을 읽느라 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읽을수록 생각이 맞닿아 있음을 느끼며 계속 읽다가 어느 즈음에 스스로 언어로 정의하지 못했던 나의 특성들이 누군가의 글로 표현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때 느끼는 짜릿함을 최근 느껴보았다.

그 작가의 글로 인해 깨달은 필자의 특징은 매우 개인주의적이라는 점이고, 우리나라는 아직도 집단주의적이라는 점이다. 그 작가에 평가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는 개인은 집단주의 문화, 그리고 그것에서 비롯한 수직적 가치질서 안에서 살아야 하므로 더 불행한 것이라고 한다. 필자도 그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필자는 어릴 때부터 집안의 종손으로 엄청난(?) 대접을 받았다. 안동에 계신 할아버지 집에 가면 '우리 종손이 왔다'면서 무언가 정갈한 밥상을 할아버지와 함께 하는 특권을 누렸다. 필자와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를 뺀 그 밖의 남자 어른들은 필자의 밥상과 달리 무언가 정성이 덜 담긴(?) 상을 받았다. 특히 맏며느리인 필자 어머니를 비롯하여 작은 어머니 등의 여성은 앞치마를 두른 채 일꾼 새참 받듯 어설피 차려진 상에서 밥을 먹는 모습이 무척 기괴해 보여 명절이나 제삿날 친척들이 모두 모였을 때 필자의 마음이 언제나 불편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 특권 아닌 특권은 대단할 것 없는 집안(혹은 가문) 이라는 집단 내에서 집단적인 질서를 의미했다. 그 질서안에서 필자의 선택과 무관하게 종손이라는 지위가 주어졌으며, 그 대가로 '종손의 도리'라는 굴레를 쓰고 개인 행복보다 집단 구성원의 의무를 추구하도록 교육받았다. 아마 이때부터 필자는 개인주의자로서 각성을 준비했던 듯하다.
물론 삼촌들이나 고모들처럼 생계를 같이하고 고락을 같이한 가족의 충고는 달게 받아드릴 수 있었다. 모든 개인주의자가 그렇듯 아무리 필자가 개인주의자라 하여 서로 얽힌 세상에서 나 혼자 살려고 할 만큼 어리석지 않기 때문이고, 오히려 그나마 크게 엇나가지 않고 성장하게 해준 것은 팔 할이 그분들의 충고 덕이어서 감사한 마음이다.

하지만, 어릴 때 명절 즈음하여 고향에 가면 "네가 택인이가?"라고 물으면서 종손의 도리를 설파하며 조상묘 앞에서 후손들의 부덕을 크게 질책하던 필자도 잘 모르는 어른들(누군가 오래 계산한 끝에 몇 촌 아재라고 알려줘도 기억하기 어려운 집성촌내 아주 먼 친척)이 계셨는데, 당시 웃는 낯으로 곱게 들었지만 내심 거북했던 기억이 선명한 것을 보면 당시 그 아재들(?)의 폭주는 타자(他者)의 집단주의적 폭행일 뿐이었던 듯하다.

이런 집단주의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모임(학교든 친목 모임이든)에서 만연해 있고 개인들에게 수직적 위계질서를 강요하곤 한다. 모임이 생기면 반드시 회장을 뽑고, 회장을 보필할 총무를 지명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회장은 집단을 운영할 돈 상당액을 부담하고, 총무로 하여금 집단의 단합을 위한 헌신을 강요하고, 회원은 총무의 헌신적인(?) 참석요구가 미안한 나머지 불참을 말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도 집단주의적 폭력과 맥락을 같이 한다.

르네상스 이후 빛을 발한 개인주의는 봉건사회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탄생시켰다. 서구에서 이식된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시 개인주의를 기본으로 한다.

권택인 변호사
권택인 변호사

결국 집단주의적 민주시민이라는 형용모순의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 국민의 행복도가 개인주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서구인들에 비해 낮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어쩌면 이 글은 독서를 통한 필자의 각성 기록이자 개인주의자로서 커밍아웃일지도 모르겠다. 개인주의자 선언을 하였다고 하여 고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합리성을 가지고 타인과 연대하여 자연스럽게 집단을 이루기도 한다. 그 결과 어쩔 수 없이 연대한 집단의 색으로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필자 개인이 색을 바꾼 것이 아니라 멀리서 보면 섞인 색으로 보여질 뿐이라는 점을 이야기해 두고 싶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