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판 기효신서./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조선판 기효신서./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명나라 무장, 척계광

가정제(嘉靖帝, 1507~ 1567)는 중국 명나라 제11대 황제로 이 황제가 집권한 16세기에는 '복로남왜(南虜南倭)'라 하여 북방에서는 여진족과 타타르족이 만리장성을 넘어와 화북지역에 약탈이 많았고, 서남 해안가에는 왜구가 출몰해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왜구는 1552년부터 침입횟수가 급증해 1555년에는 한해동안 101차례의 침입이 있을 정도로 많았다. 왜군은 침략횟수만 증가한 것이 아니라, 침략규모도 커져 수 천명에서 수 만명에 이르기도 했으며, 진법(陣法)을 가진 체계적인 군사집단이었다. 이와 반대로 명나라 관군은 '군호(軍戶)'라 해 특정계층이 담당한 상황이라 전투를 수행할 수 없었던 것은 물론 의지도 부족했다. 결국 이를 대비하기 위해 명나라 중기부터 세습으로 이루어지던 무관을 무과(武科)에 의해 선발하고 병사도 모병제로 전환했다.

명나라 무장 척계광(戚繼光)도 원래는 6대에 걸쳐 무장을 지낸 집안으로 그 역시 당시의 관계대로 부친의 직을 이어 17세의 나이인 1544년에 등주위(登州衛) 지휘첨사(指揮僉事)에 임명되어 1556년 이후 왜구토벌에 전공을 쌓았다. 그러나 기존 군사체계로는 왜구를 효과적으로 상대할 수 없음을 알게 됐다. 당시 명나라는 개인의 무예를 중시해 각지의 무술가와 개인 호위무사, 그리고 이민족들을 군에 유치해 활용했다. 하지만 개개인의 기량만으로는 조직적인 왜군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를 알게 된 척계광은 조직적인 군사운용과 무기배합 등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기효신서'를 저술했다. 기효신서에는 군대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편제, 군대를 통솔하는 신호, 각종 군법과 규정, 그리고 부대 운영법, 그리고 무예를 포함시켰다. 군사적으로 비전문적인 계층을 대상으로 만든 책이기 때문에 역할 분담과 구체적인 설명으로 구성됐고, 기능을 분화시켜 병사 개인이 훈련할 양을 줄이고 조직적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병법을 포함시켰다.

명나라 무예를 가르친 조선

명나라와 마찬가지로 조선도 임진왜란 초기에는 열악했다. 당시 조선은 전술적인 측면보다는 무기와 무예에 집중했고 훈련도 미비해 패전을 초래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1593년 선조는 새로운 전술과 훈련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훈련도감(訓鍊都監)을 설치했다. 류성용의 권유로 '기효신서'를 수입해 명나라의 전술과 훈련방법을 새로운 훈련방식을 받아들이는 창구로 훈련도감이 그 역할을 했다. 훈련도감에서 양성된 교육생들은 지방으로 파견되어 지방군의 훈련을 지도하고 감독하기 시작했다. 훈련도감이 새롭게 정립된 조선의 군사훈련방식의 표준이 된 것이다. 훈련도감이 설치된 초기에는 무예능력보다는 신체만 건강하면 누구나 지원할 수 있게 해 약 500여명을 선발했다. 그리고 그들을 포수로만으로 구성하고 화포훈련에 중점을 뒀다. 당시 화포는 조총을 말하며, 왜군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조총수가 효율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훈련도감을 통해 훈련된 병사들이 실제 전장에 나가 경험하면서 조총만으로는 역부족임을 알게 됐고, 전술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포수뿐만 아니라, 근접전투의 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됐다. 결국 1594년 광해군을 호종했던 의용대를 '살수(殺手)'라는 이름으로 훈련도감에 편입시켰다. 이것은 화약과 화약무기의 생산량이 저조했던 당시의 문제를 극복하고 기존의 군사력을 활용해 포수를 보조할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겠다는 의도였다. 그리고 수문장과 금군의 일부를 사수(射手)로 편입시켜 훈련도감은 삼수병(三手兵) 체제로 정비했다. 이 중에서 살수는 무예훈련을 기본으로 한 개인의 연무와 대련 훈련을 했고, 사수(射手)는 활쏘기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 그러나 살수의 경우는 구체적인 훈련방법보다는 활쏘기를 익히는 방법에 대해 조언하는 수준이었다. 당시 조선의 활쏘기는 명나라나 왜보다는 앞선 수준이었다는 점에서 기효신서에 의지하지 않고 조선의 훈련방식을 그대로 유지한 무예였다.

변화에 만족한 조선의 굴욕

활쏘기를 제외하고는 조선에서 정립된 무예는 없었다. 따라서 살수에는 기효신서의 무예인 사법(射法)을 비롯해 창(槍), 당파, 낭선, 등패, 곤(棍), 권법(拳法)를 그대로 수용했다. 그러나 기효신서의 무예는 세(勢)만 있고 보(譜)가 없는 상태라 무예의 일정한 연무형태를 이해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명나라는 기효신서에 나온 무예를 지도할 수 있는 교사(사범)를 파견하기도 했고, 이들은 임진왜란 이후에도 조선에 남아 무예를 지도하기도 했다. 그리고 척계광 사후에도 명나라는 재구성된 기효신서들을 만들어 훈련시켰고, 조선은 1664년 당시 병조 판서였던 김좌명이 중국의 다양한 기효신서를 비교해 재간행한 조선판 기효신서를 만들어 혁신적인 병서로 활용했다.

이 병서는 '무예도보통지'기 편찬된 정조대까지 '척법(戚法)'이라는 이름으로 주요 교범으로 사용됐다.

허건식 체육학 박사·WMC기획경영부 부장

하지만 조선은 무기와 전술, 그리고 무예는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명·청 전쟁에서 척계광의 전술로 다져진 명나라가 청나라 군대에게 몰살을 당했음에도 조선은 이를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조선은 능력이 있는 무관의 선발에 대해서도 외면했다. 결국 조선은 임진왜란이후 일시적 변화에 만족한 것이 또 다른 비극을 만들어냈다. 1910년 경술국치이전의 조선왕조 최대 굴욕사건인 '삼전도의 굴욕'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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