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종완 위로&소통연구소

지난 주 강원도 인제의 점봉산 곰배령을 다녀왔다. '할머니들도 콩 자루를 이고 장보러 넘어 다녔다'는 곰배령은 1천164m 정상까지 오르는 길이 완만했다. 정상에 형성된 5만여 평의 평원에는 희귀식물이 서식하고 동자꽃, 노루오줌, 물봉선 등 야생화가 펴있어 천상의 화원으로 불려질만했다. '곰이 하늘로 배를 드러내고 누운 형상'에서 이름 붙여졌다는 곰배령은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과 유네스코 생물권보호구역 지정에 걸맞게 원시림을 걷는 느낌이 들었다.

곰배령의 중간지점에 오를 무렵 아내와 나는 정상에서 내려오던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4쌍의 부부와 쉼터의 동석자가 되었다. 그들 사이에 오고가는 말이 유난히 요란스럽고 낯설어 그들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한 부인이 "시원한 커피 한잔 하시지요"라며 배낭에서 보냉병(保冷甁)과 종이컵을 꺼내 일행에게 냉커피를 따라 주었다.

그 와중에 일행 중 한 남자가 커피를 준비해온 부인에게 "산에 오는데 무겁게 보온병까지 가지고 다닌다"며 뜬금없이 비아냥거렸다. 여기에 "보온병은 까딱하면 세균이 득실거릴 수 있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보온병 부인의 표정은 순식간에 일그러졌고, 그 부인의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는 "무겁지 않다"는 말과 함께 겸연쩍게 보온병을 어깨에 걸치는 시늉을 하며 속상한 마음을 드러냈다.

곧장 이번에는 한 여자가 "커피를 마시기엔 종이컵이 너무 좋네요?"라며 커피를 준비해온 부인을 타박했다. 부인은 어처구니없는 지청구가 못마땅했던지 "마트에 가면 싸게 많이 팔아요."라는 말로 대꾸했다. 부인의 표정에서 화를 참고 있는 모습이 역력하게 보일 때쯤 부인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남자가 뻔뻔스럽게도 "커피 한잔 더 주실래요?"라고 요구한다. 이에 부인은 아무 말도 없이 커피를 냉큼 따라 주었다.

나는 일행의 행동에서 주종적인 관계의 역동을 보았다. 냉커피를 준비해온 부인은 핀잔을 받는 사람으로, 그를 지탄했던 남자는 핀잔을 주는 사람으로 관계가 굳어진 듯 보였다. 일행들 사이에서 그 남자는 매사 지적하는 사람으로 고착화된 듯하다. 커피를 준비해온 부인을 남자가 비꼴 때 일행 중에 누구도 그 부인을 편들거나 그 남자를 타박하지 않았다. 커피를 준비해온 부인은 깔봄을 당하는 모욕감을 느꼈으면서도 일행과의 다음 산행에도 냉커피를 준비해갈 것이 뻔하다. 주종적인 관계에서 빚어지는 역동은 반복적이기 때문이다.

커피 준비에 고마운 마음을 전하기는커녕 조롱하며 비꼴 때는 언제고 한잔을 더 달라고 요구하는 그 남자의 심리가 주종관계의 단적인 폐해다. 그 부인은 그 남자가 자신을 만만하게 보고 무시하는 말들을 해도 무방한 관계로 방치한 탓에 수모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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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인이 그 남자에게 휘둘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주종관계로 굳어진 원인을 냉철하게 꿰뚫어 인식하고 대등한 관계로 재정립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하산 길에 커피를 좋아하는 아내는 "저 한 잔 주시면 안돼요"라는 말로 그 부인을 두둔해주고 싶은 마음을 참느라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나는 이들에게서 나타난 관계의 역동을 떠올리며 오지랖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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