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박성진 사회부장

"결재를 잘 받는 것도 능력이다. 집무실 분위기 파악 못하고 불쑥 들어갔다가는 괜한 꾸지람만 듣는다."

결재권자가 기분 좋을 때 서류를 들이대야 매끄럽게 서명을 받는다는 얘기다. 이도저도 모르고 무작정 결재권자를 마주했다가는 낭패를 보기 일쑤다.

비서실(부속실) 직원과 사이가 좋다면 결재권자의 기분 정도는 파악할 수 있으니 봉변을 피할 수도 있겠다.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의혹 사건으로 세상이 시끄럽다. 이 사건 여파 탓인지 '심기(心氣) 보좌'라는 말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심기 보좌'는 독재시대를 상징하는 용어다. 권위주의시대 산물이기도 하다. 이 용어가 등장한 시대는 전두환 정권 때다. 전 전 대통령을 보좌한 당시 장세동 경호실장이 '대통령 마음이 편안해야 국정도 잘 되니, 심기까지 경호하자'는 의미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 때는 '심기 경호'라는 용어였다. 굳이 대통령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당시에는 권력 주변 곳곳에서 이런 허무맹랑한 상황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졌다고 한다.

사단장이, 장학사가, 관선 시장·군수가 일선 현장을 방문하기 전에 사람들을 동원해 잡초 뽑고, 먼지 털고, 도로를 세척하는 그 난리를 폈던 기억이 많은 이들에게 있을 것이다.

이 모든 행위의 배경에는 그저 기분이라도 좋게 해 쓸데없는 지적질을 피할 요령이었을 것이다. 일본에서도 '심기 보좌'라는 의미로 통용되는 '손타쿠(忖度·윗사람의 뜻을 헤아려 행동)'가 공직사회를 조롱하고 있다고 한다.

최근 '심기 보좌' 용어가 재등장하고 있다. 신문지면 최상단을 여러 번 장식했다. 코멘트로 처리한 헤드라인은 "… 심기 보좌 '기쁨조' 역할 강요 받았다" 등 원색적인 문구로 채워졌다.

이런 제목은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의혹 사건이 단초가 됐다. 비서들의 업무는 시장의 기분을 좋게 하는 데 맞춰져 있었다는 기자회견 발언에서 기인했다. 박 전 시장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고소인 측의 주장이다.

권력자의 기분을 상쾌하게 유지시키는 것이 비서의 중요한 업무였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심기 보좌'다. 그렇다면 '심기 보좌'는 비서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업무'였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공무원이 있다면 굉장히 순진하다며 웃음거리가 됐을 것이다.

박성진 사회부장
박성진 사회부장

대부분의 공공기관에서 출근부터 퇴근까지 '장(長)'의 기분을 최고로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처럼 굳어졌다. 이를 위해서는 온갖 수단이 동원된다. 심기를 흐트려놓지 않기 위해 시급한 정책적 판단이 미뤄지거나 무리하게 사업을 추진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저 굽신대는 공무원들의 '알아서 기는' 관행 때문에 무리수가 따르기도 한다.

이런 그릇된 보좌 스타일이 사안의 경중과 무관하게 시도때도 통한다는 건 재앙이다. 때로는 심기를 가리지 않고 과감하게 충언을 해야 한다. 아쉽게도 그런 공무원은 별로 없다. 이제는 국민들의 심기도 눈치를 볼 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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