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진순 수필가

장맛비는 그칠 줄 모르고 내리고 있다.

보일러를 돌리고 창밖에서 밀려오는 공기가 차가워 침대에 불을 넣었다. 초원에 누운 듯 앞 뒷뜰의 우거진 숲들이 다정하다. 마치 좌청룡우백호를 갖춘 명당이 아닌가 싶다.

문득 1985년 2월 결혼 10년만의 허름한 한옥을 사서 대대적으로 수리를 했었다. 세멘 330포를 들여 창호지로 바르던 문짝을 다 떼어 내고 살기 편하게 고쳤다. 그 기쁨은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앵두나무로 울타리를 삼았고 대문 앞에 살구나무를 심었다. 여기저기 몸에 좋다는 오가피와 헛깨나무 엄나무 호두나무까지 심어서 가꾸기 시작 했다. 우리 부부는 겁 없이 나무를 대책 없이 심었다. 그 결과 지금은 숲속의 집이 되어버렸다.

새벽이면 새들의 노래 소리가 시끄러워 눈을 뜨고 엄나무위에 까치가 울고 외래종 참나무 단풍이 곱다고 심어놓은 아름드리 나무둥치엔 말벌과 집게 벌래와 장수하늘소가 살고 꾀꼬리가 공생하며 놀이를 즐긴다.

직업이 아로마 테라피스트이고, 천연제품을 만들다 보니 밭에는 온갖 허브들이 자라고 있다. 라벤더,로즈마리, 방아풀, 어성초, 스피아민트,오데코롱,애플민트,레몬밤,마가렛등등 허브향으로 가득하다.

하루 종일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풀 뽑고 가지치고 자연인처럼 무공해 채소를 가꾸는 재미에 푹 빠지다 보면 하루해가 기운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하늘이 내게 준 휴식 시간이다. 섬기는 하느님 앞에 촛불을 붙이고 감사의 기도하는 날이다.

부부는 마주앉아 찻물을 데우고 다관에 물을 따르며 물소리를 음미하니 귀가 즐겁고, 차를 마시며 텔레비젼의 가요를 듣는다. 어쩌면 저렇게 재주꾼들이 많은지 다양한 춤과 노래에 흠뻑 빠져들었다.

허둥지둥 무엇에 쫓기듯 살아온 세월이었다. 아내의 자리와 어미노릇도 잘 했다고는 할 수 없었고 사업가로도 성공하지 못했지만 최선을 다한 내 삶이었다. 이제 고희의 나이에 접어들어 살림다운 살림살이를 하고 사는 것 같다.

아이들 다 짝 찾아 떠나보내고 여기저기 쓸고 닦으며 다독거리는 즐거움을 맛보고 있다. 조롱조롱 매달린 호박을 따다 요리를 하고 넘치게 열린 오이로 소박이도 담고 피클을 담아 아들딸들에게 어미의 정성과 사랑을 전할 참이다.

손녀딸들이 보내온 고양이는 오늘도 방안을 들여다보며 "야옹"거리며 인사를 한다. 어느새 분꽃이 알록달록 곱게 피었다. 마치 하늘을 향하여 나팔을 부는 듯싶다. 비가 그치니 약속이나 한 듯 이웃들도 대문을 열고 나왔다. 두런두런 사람들의 목소리가 그리운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는 공감의 소리들을 했다. 이웃의 얼굴을 보니 활력이 생겼다.

너울거리며 춤추는 호박잎과 세상 좁은 줄 모르고 뻗어나가는 참외와 수박줄기, 조롱조롱 매달린 방울토마토, 텃밭 식구들이 반가웠다.

이진순 수필가
이진순 수필가

칠 동안 호두나무 두 그루에 제법 많이 열린 호두를 청설모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전쟁을 했다. 약국에 들여 크레졸과 과산화수소를 혼합하여 물병에 담아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고 장대와 양철통으로 난타를 쳤다. 보람도 없이 삼일동인 줄기차게 내리는 비 때문에 방콕하고 있는 동안 어쩌면 한 개도 남기지 않고 다 따 가버렸다. 허탈감에 호두나무를 올려다본다.

그사이로 왕거미가 그물망을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예쁘게 쳐놓고 한가운데 엎디어 명상을 즐긴다. 방울방울 매달린 은구슬이 곱다.

"후두득"거리며 소낙비가 양철지붕위로 발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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