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김윤희 수필가

그림자도 쉬어간다는 누정에 올랐다. 만삭이 된 초록이 호흡을 고르고 있다. 출산하기 전 마지막 라마즈호흡에 든 산모의 경건함이 흐른다. 울울창창한 성산에 온통 이슬이 비친다. 별곡이 탄생된다. 성산의 별곡이 창계천(滄溪川)을 타고 흐르고 흘러 오늘에 이르고 있음 아닌가.

식영정, 누마루에 잠시 걸터앉으니 풍류객과 노니는 듯 맘이 달뜬다. 성산 자락에 창창한 소나무 숲이 마음을 맑혀준다. 그 옛날의 창계천과 자미탄을 가슴 한켠에 품고 있는 광주호가 송림 사이로 내려다보인다. 배롱나무 붉은 꽃잎이 분분히 내려앉았을 물결이 유유하다. '식영정 사선(四仙)'이라 불리는 김성원, 임억령, 정철, 고경명이 읊은 '식영정 20' 풍치를 그려 본다. 문외한도 빠져들 듯한 풍광인데 불같은 열정을 품은 송강이야 어떠했을까. 사시사철을 맞는 아름다운 성산의 풍경이 별곡으로 탄생함이 어찌 우연이리.

식영정의 주인장은 서하당 김성원이다. 송강 선생의 처외재당숙이며 환벽당에서 송강과 동문수학한 사이다. 그가, 스승이며 장인인 석천 선생을 위해 지었다한다. 송순, 양산보, 기대승 등 사림들이 즐겨 찾으며 음풍농월하던 누정이다. 언덕 위에 장중하게 나래 펴고 자연과 어우러진 정자의 팔작지붕에서 선비의 풍모가 느껴진다. 여여한 품안에 그림자마저 자적하니 절로 시심이 우러날 밖에. 시선(詩仙)들이 머물던 자리에 앉아 마룻장을 쓸어 보면 글 한편 건져 올릴 수 있으려나?

눈길을 들어 광주호 건너편 환벽당을 건너다본다. 사촌 김윤제가 후학을 양성하던 곳으로 송강이 청소년기를 보내며 감성을 키우고 익혔을 터. 송강 인생의 출발점이 예서 비롯되었다 해도 과언은 아닐 성싶다. 식영정, 소쇄원과 함께 선계의 정자원림 세 곳 중 하나다. '일동삼승'이라 불린다. 성산자락을 타고 흐르는 광주호 언저리는 온통 초록 물결이 너울지고 지고 있다. 창계천의 이름으로, 흐드러져 쏟아진 자미화를 품던 그 시절이 못내 그리워 저리 시린 마음이 울렁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담양은 댓잎에 이는 바람이 아니라도 맑은 기운이 돈다. 이곳에 발 들이자마자 눈길을 잡은 것이 '가사문학면'이다. 면단위 행정명이 가사문학이라니, 낯선 지역명이 반가우면서도 신선하다. 가사문학의 산실답다. 곳곳에 관련된 정자원림이 자리를 틀고 앉아 있다. 문향이 피부에 와 닿는다. 그곳에서 배어나오는 고풍스런 향취는 어느 한두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이 느껴진다.

앞선 이가 길을 내고 오랜 세월 가꾸어온 그 길을 따라 걷는다. 길은 거저 나있는 것이 아니다. 맨 처음 발 들인 사람이 가시덩굴 헤치고 땅 고르며 걸었던 발자국이다. 그렇게 누군가 앞서가면 그게 길이 된다. 덤불에 긁히고 패인 상처가 아물어 단단해진 길을 지금 나는 유유자적 누리고 있다.

물, 바람, 산세, 자연이 빚어낸 절경은 보는 이가 주인이다. 같은 풍광을 보고도 다 달리 마음 가는 걸 보면, 아름다움은 보는 이의 마음결이 아닌가 싶다. 옛 문호들이 읊어 놓은 시가에서 여유와 호방한 품격이 느껴진다. 자연을 벗 삼아 마음을 키우고 품을 넓혀가라 이르는 식영정의 솔바람 소리를 담고 돌계단을 밟아 내려온다. 무언가 그득 차오른 듯 발걸음이 기껍다.

 

김윤희 수필가 약력

▶2003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김윤희 수필가
김윤희 수필가

▶한국문인협회, 한국수필가협회 회원, 충북수필문학회부회장
▶한국문협작가상, 대표에세이문학상, 불교청소년도서저작상, 충북예술인공로상 수상
▶수필집 '순간이 둥지를 틀다', '소리의 집', '사라져가는 한국의 서정'
▶진천군립도서관상주작가, 문학관, 도서관 수필교실 강사
▶yhk380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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