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건식의 무예이야기 - 조선 최고의 검무사(劍武士), 김체건
허건식의 무예이야기 - 조선 최고의 검무사(劍武士), 김체건
  • 중부매일
  • 승인 2020.07.30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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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체건이 정립한 왜검 교전보(무예도보통지)
김체건이 정립한 왜검 교전보(무예도보통지)

조선, 왜검을 고민하다

16세기 임진왜란과 더불어 선조와 인조대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조선은 뒤늦게 사대교린(事大交隣)의 외교정책을 준수하며 내부적으로는 사회적 안정과 군사력 강화를 통해 급변하는 동북아 정세에 대비했다. 병자년의 수치를 겪은 조선은 청나라에 삼번의 난(三藩之亂)이 일어나자 효종과 현종대에 무모한 북벌정책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를 철회한 숙종은 일본과 청나라의 우수한 군사기법을 도입해 전투력을 향상하는데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무협지 같은 삶을 산 무관 김체건(金體乾)이 등장한다.

김체건은 젊은 시절 훈련도감의 선발시험에 합격해 삼수중 하나인 살수(殺手)가 됐다. 그는 느슨함을 싫어하는 인물이었으며, 훈련도감의 직업군인으로서 다른 군사들에 비해 우수한 무예 실력과 특수임무를 완수하면서 군사활동 이외에도 왕족이 고위관리를 경호하는 군교(軍校)의 신분까지 오르게 됐다. 김체건의 능력이 발전할 수 있었던 계기는 국방력 강화에 중점을 둔 숙종과 일본 왜검의 정보를 파악하려고 노력했던 훈련대장 유혁연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왜검을 탐하다

북벌정책을 지지했던 유혁연은 남인출신으로 유능한 무관이었으며 훈련도감의 기능과 전력 강화에 노력한 무관이었다. 특히 그는 청나라와 조선에서 가장 경계하고 있던 일본의 왜검에 대해 항상 고민했다. 이미 조선에서는 일본의 왜검을 신검술(神劍術)라 불렀으며, 배우는데 있어서도 비밀로 이루어져 쉽게 접하지 못했다. 이를 고민하던 유혁연은 숙종에게 제안해 허락을 받고 김체건을 초량왜관(부산)에 일꾼으로 들어가 왜검을 입수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김체건은 이 곳에서 1679년부터 1682년까지 약 3년간 노비로 위장근무를 하며 왜검을 배웠다.

그 후 1682년 우의정 김석주가 청나라 사신으로 가는 자리에 금위병(왕을 호위하는 직속의 군인 혹은 군대)의 한명을 데려가 중국의 기예(무예)를 배워오겠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있다. 이 금위병이 바로 김체건으로 보고 있다. 중국을 다녀온 김체건은 같은 해 또다시 일본의 검술을 파악하기 위해 통신사 일행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이때 일본의 다양한 유파의 검술을 배웠다('능허관만고'의 무예육기연성십발설).

이렇게 검술을 완벽하게 터득한 김체건은 훈련도감에 복귀해 숙종이 직접 훈련도감에 행차한 자리에서 검술시범을 보였다. 당시의 모습은 유본학(1770-?)이 쓴 '김광택전'에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임금앞에서 시범을 보였는데, 환상인 듯 하여 사람들을 끝없이 놀라게 했다. 또한 재를 땅에 뿌려놓고 맨발로 양쪽 엄지발가락을 이용하여 재를 밟았고, 그리고 나는 듯한 칼춤은 춤의 경지에 이르러, 재에는 발자국이 남지 않으니, 그 몸의 가볍기가 이와 같았다." 김체건의 현란한 검술 시범을 본 숙종은 그의 노고를 치하하며 훈련도감의 '교련관(敎鍊之官)'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교전지세(交戰之勢)'를 창안해 조선병사들의 단병접전에 적용했다. 훗날 정조때 이 검법은 '무예도보통지'의 왜검의 교전보에 포함시켰고, 양날이던 검(劍)을 외날인 요도(腰刀)로 변경했다. 그리고 병사들이 연습과정에서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 목검에 가죽을 씌어 사용토록 했다. 이를 두고 현대검도인 일본 켄도(劍道, Kendo)의 한국 도입기를 김체건이 활약한 숙종 때로 보기도 한다.

무예도보통지에 담다

무예도보통지의 왜검에 나온 김체건의 이야기
무예도보통지의 왜검에 나온 김체건의 이야기

이처럼 김체건은 중국무술뿐만 아니라 일본 검술도 배워 한·중·일 무예를 수련한 조선의 유일한 무관이었다. 그는 조선 최고의 검술가로 이름을 알렸으며, 1699년 종4품 무관직인 두모포(豆毛浦) 만호(晩湖, 외침방어를 목적으로 설치된 만호부의 관직)에 임명됐고, 1711년 별무사(別武士)로 재임했다. 만년에는 왕위 계승권자로 불리던 연잉군 이금(영조)의 경호를 수행했고, 이 연잉군 집안의 여종사이에 아들 김광택(金光澤)을 낳았다. 김광택의 원래 이름은 '국표(國標)'였으나 내의원 제조였던 이이명이 나라를 위한 몸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광택(光澤)'으로 지어준 것이다.

허건식 체육학 박사, WMC기획경영부 부장
허건식 체육학 박사, WMC기획경영부 부장

김광택은 아버지 김체건의 무예실력을 그대로 이어받아 무예에 능했다. 1747년 사도세자의 장인인 홍봉한의 집에 머물고 있다가, 영조의 배려로 훈련도감의 교관이 됐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검술을 배웠고, 김홍기에게 경신술과 술법을 전수받아 검술의 달인의 의미를 가진 '검선(劍仙)'으로 불렸다. 그리고 김광택의 제자인 백동수에 의해 정조때 발간한 '무예도보통지'에 김체건이 만든 '왜검 교전보'를 넣어 후세에 전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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