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라다크에 다녀온지 이십 년이 되었어도 그때가 그립곤 한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저서 '오래된 미래'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그 책에 나오는 라다크 고유의 전통, 서구 문명에 의한 환경과 공동체 파괴, 새롭게 요청되어 실천되는 지혜 등을 짧은 여행 동안 많이 볼 수는 없었으나 풍광과 삶 곳곳에서 진한 감동을 받았다.

청주 옥산면의 소로리에 사회적 협동조합 운동으로 뛰어든지 이년째 되어간다. 마을 공동체 운동으로 긴 내력을 지녔다고 할 순 없지만 그간에 얻은 경험과 교훈들은 값져 보인다. 소로리는 마을 공동체 운동을 하기에 훌륭한 요소들이 풍부하다. 팽나무제, 달집 태우기, 마당극 등이 살아 있는데다가 1만5천년 내지 1만7천년 전으로 추정되는 세계 최고의 볍씨 고장으로도 유명하다.

내가 속한 '임원경제 사회적 협동조합'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서유구 선생의 저작인 '임원경제지'를 기반으로 한 바 그 취지에 걸맞는 마을을 찾다가 소로리에 끌렸다. 이 마을과 뜻이 맞아 마을의 협조를 얻어 논과 밭을 2만 평 남짓 빌려 토종 작물들을 친환경 유기농으로 재배하고 있다.

토종 씨앗의 수거 및 나눔 운동 전문 단체인 '전국씨앗도서관 협의회', 논생태를 위한 '논살림 사회적 협동조합' 등과 끈끈한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다. 한겨례 신문과도 제휴해 '한겨레 소로리 토종학교'를 설립, 운영하고 있다. 토양, 토종, 논생물, 자연퇴비, 음식 등등의 전문가들이 강사로 섭외되었고 수강생들이 전국에서 모집되어 5월말부터 11월까지 25번의 강의 및 실습이 이루어진다. 벌써 1/3 이상이 진행되는 동안 의미와 가치가 공유되며 확산되는 분위기이다.

작고 소박한 이 공동체 운동에 '오래된 미래'라는 타이틀을 붙이는 것이 과장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은 물방울들이 모여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룬다. 지금 세계는 주지하다시피 인권. 불평등 등등 외에도 환경 오염, 생태계 파괴 역시 심각하다.

소로리에 임대한 다랭이 논엔 토종벼인 녹토미 등이 친환경 유기농으로 재배되고 있다. 최근에 논살림 회원의 지도 아래 그 논의 생태를 조사한 결과 우렁이, 게아재비, 거머리, 잠자리 유충, 물자라 등등 다양한 생명체들이 채집되었다. 그 중 물자라는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물자라는 암컷이 수컷의 등에 알을 낳는데 알을 등에 수북히 붙이고 있는 수컷 물자라가 발견된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수강생들은 신기해 마지않았다.

현대 농법은 주로 대량생산 체제에 입각해 있다. 비료와 농약의 과다 사용으로 인해 흙의 오염, 종 다양성의 상실이 초래되고 그에 따라 농작물들이 천연의 형질에서 변형되어 있다. 그 결과는 인체에도 고스란히 영향을 미친다.

다양성에 대한 추구, 인간 욕망의 변화, 진정한 건강에 대한 갈망, 자연과의 공생, 다가올 인구 절벽 등등은 이런 기반을 근본적으로 뒤흔든다. 소로리에서의 공동체 운동은 이런 거대 변화를 인지한 바탕에서 태동된 운동이다. 실제로 소로리에서 토종 작물로 친환경 재배를 하는 논밭엔 흙이 오염에서 벗어나 건강한 흙으로 되돌아가고 떠났던 생명체들이 돌아온다. 흙, 생명체, 작물 간에 유기적 관계가 회복되어 순환의 리듬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다른 가치 있는 공동체 운동들과 더불어 오래된 미래를 향한 징검돌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지구적 위기를 돌파하려는 모색 중 하나로 이해 받아야 마땅하다.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이런 가치 지향적인 일이 인간미 흐르는 협업과 숭고한 노동의 땀을 통해 성실하게 이루어져감에도 정작 협조해야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외면하고 도리어 방해를 하는 게 가슴 아프다.

물론 우리 조합의 내적 미흡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은 스스로 고쳐나가야 하겠지만 이제라도 가치는 가치의 눈으로 봐야 한다. 지구는 편견과 고정관념으로부터도 보호되어야 할 진귀한 보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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