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영옥 수필가

여름이 시작되면 무궁화가 피기 시작한다.

나라꽃이라고는 하나 무궁화를 흔하게 만나는 일은 쉽지 않다.

어릴 적 고향집 우물 곁에는 커다란 무궁화 나무가 있었다.

유난히 진드기며, 벌레가 많이 낀다는 무궁화 나무에 아버지는 꽤나 정성을 들이셨던 듯하다. 진드기 약을 정성껏 뿌려주고, 거름도 자주 해주고, 벌레도 직접 잡아주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얼마 전 이른 더위가 한창인 호암지를 산책하다가 막 피기 시작한 무궁화 꽃을 만났다. 때가 저녁 무렵이었으니 활짝 핀 꽃을 만난 것이 아니라, 또르르 꽃잎이 말려 땅위에 떨어져 있는 무궁화 꽃을 본 것이다.

옛날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꽃이 통째로 둥글게 말려 떨어진 무궁화 꽃을 쌓아두고 배추장사를 했던 소꿉놀이 그 시절로….

우리들의 소꿉놀이의 재료는 참으로 다양했다.

밥짓기로는 부드러운 흙, 고운 모래, 봄이면 막 돋아오르는 새싹들, 작고 예쁜 봄꽃들, 여름이면 앵두며, 아까시아꽃이며 온갖 자연의 예쁜 것들이 소꿉놀이의 재료들이 되어주었다. 사금파리 조각들을 비롯해 그릇들이 될 만한 모든 도구들을 모아놓고 우리는 꽤 오랜 기간 동안 소꿉놀이를 했다. 초등학교 내내 어쩜 중학교에 입학할 때까지로 이어졌는지도 모르겠다.

학교가 끝나면 앞뒤 뜰이 넓었던 우리 집으로 모여 든 친구들은 두 세 명 씩 짝을 이루어 가족을 만들었고, 가족의 역할을 정하였고, 밥상을 차리고 늘 두 세 가족이 함께 모여 가짜 식사를 하곤 했다.

부모가 시장에서 야채가게를 했던 친구는 또르르 말려 떨어진 무궁화 꽃을 쌓아두고 배추 장사를 했고, 엄마가 시장에서 부침개를 부쳐 팔았던 친구는 진흙을 이겨 그 위에 노란 양지꽃잎을 올려놓은 꽃전을 부쳐 팔기도 했다. 그렇게 해질 녘까지 우리들은 소꿉놀이에 몰두 했었다.

날이 추워져 밖에서 놀지 못할 땐 집안으로 들어가 인형 놀이를 했다. 공주 얼굴을 잘 그렸던 나는 종이에 예쁜 여자애를 그리고 오려, 거기에 옷까지 그려내고 오려내 인형 옷을 파는 옷가게를 벌이기도 했다. 그렇게 꽤나 재미나는 인형 놀이에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아빠, 엄마를 정하고 아들, 딸을 정하고, 아빠는 직장으로, 엄마는 가짜 밥을 짓고 아들, 딸들은 학교로 가 학교놀이까지 우리의 역할극은 완벽했다.

다음 날이면 새롭게 가족이 짜여지고, 물론 역할은 다시 정해졌으며, 우리는 돌아가며 새롭게 맡은 가족의 역할에 충실했다.

김영옥 수필가
김영옥 수필가

지금으로 보면 정신과 치료에서나 한다는 그런 역할극 말이다. 상대의 처지가 되어 역할극을 하면서 마침내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하게 된다는.

어릴 적 우리는 이미 소꿉놀이, 인형 놀이를 하며 집단적, 또는 개인적 역할극을 통해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그 마음의 기초를 닦았던 것은 아닐까.

학교가 끝나기 무섭게 학원으로, 공부방으로 쫓기 듯 향하는 요즘 아이들, 그들이 이끌어 갈 미래의 모습이 안개 낀 듯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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