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유창선 수필가

알람 소리에 잠 깨어 방문 열고 거실로 나서니 청향이 나에 코 끝을 스친다. 거실 문갑 위에 놓여있는 관음소심이 밤새 꽃망울을 터트리고 맑은 청향을 내어뿜고 있다. 관음소심은 가을에 피는 추란인데 어쩌다 계절을 잃어버렸는지 때 아니게 일찍 꽃을 피웠다.

순백에 자태와 아름다운 향기에 홀려 한참을 바라보다, 문득 오래전 산채를 다니던 때가 생각났다. 한때 난 산채 다니는 재미에 푹 빠져 계절을 가리지 않고 휴일날은 거의 빠짐없이 산채를 다니던 적이 있었다.

처음 산행에서는 '우리 춘란이 이렇게 생겼구나'라는 정도만 알았고, 등산 다닌다는 기분으로 난 산채를 다녔다. 그러다 세 번째 산행에서 처음으로 변이종을 만났다. 그날도 봉고차로 아침 6시에 출발, 현지에 9시쯤 도착해서 2인 1조로 산채를 시작했다,

초보인 나는 선배 애란인들에 조언대로 난 잎에 무늬가 들어간 것을 찾으며 산행을 시작한지 세 시간 정도 지났을까, 목이 말라 배낭을 벗어놓고 물병을 꺼내어 물 한 모금 마시려는데 시야에 언뜻 히끗 히끗한 난 잎이 보였다.

물 마시는 것조차 잊고 엎드려보니 난 잎에 새햐얂게 세로로 줄무니가 들어가 있는 난 다섯 촉이 너울 거리고 있다, 한참을 살피다 아 이런 것이 변이종인가 보다 생각하면서 조심스레 채란 배낭에 담아놓고 막 일어서려는데 등 뒤에서 "좋은 난 하셨나요"라는 소리에 뒤돌아보니 난 집 사장님이다.

"점심식사는요" 아직 식전이라 하자 함께 식사하자며 양지쪽에 앉자 도시락을 펼쳐 놓고 함께 식사하며, 채란하면서 있었든 에피소드 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배낭에서 산채 한 난을 꺼내어 보여주었다. 한참을 이리저리 살피든 사장님은 잔디를 손으로 뜯어 벌브를 감싼 후 호일에 싸서 내게 건네주며, "축하합니다 정말 오랬만에 난 다운 난을 보았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이 난이 옆에 품 중 최고로 치는 중압이라며 광옆에 후육이고 무늬도 설백이고 모자도 깊게 눌러써서 어느 한곳 부족함이 없다면서 자신이 산채한양 좋아했다,

하산하는 길 내가 산채 한 난에 가격을 묻자 촉당 20만 원 정도는 갈 거라 하며 팔거라면 팔아주겠다고 했다, 당시 나에 한 달 급여가 8만 원이였으니, 다섯 촉이면 나에 1년 치 연봉보다도 더 큰 금액이었다.

그날 이후로 10여 년 난 산채를 다니며 많은 변이종 난들을 산채하여 애지중지하며 온갖 정성을 다 쏟아부으며 길렀다. 그러던 어느 해 여름, 직장일로 일주일간에 출장을 다녀와보니 모든 난이 연부병에 걸려 다 죽어 가고 있었다.

근 10여 년 모아 온 난들을 불과 일주일 사이에 다 날려 버렸으니, 그 상실감은 이루 다 표현치 못할 정도였다. 그런 나에 모습을 지켜보든 아내가 내게 한마디 했다, "이제 난에 노예에서 벗어날 수 있어 좋다"라고.

유창선 시인
유창선 수필가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얼마나 그동안 난에만 내가 정신을 빼앗기고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했으면, 아내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까, 나는 그날 이후 산채 다니는 것을 그만두었다, 뒤돌아보면 그동안 취미생활을 한답시고 나 자신은 물론 온 가족 모두가 난에 노예가 되어있었든 건 아닐까.

어느 곁에 내 곁에 왔는지 난향에 취해있는 내게 아내가 툭 한마디 던진다, "이제껏 난을 아끼고 사랑했듯 이제는 나를 좀 예쁘게 보아달라"라고.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