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오계자 소설가

역사공부를 하면서 안타까운 사례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가슴 치는 문제는 조선의 성리학이다. 지난해 화양 서원에서 성리학을 주제로 선비 체험 학습 행사에 참석 했다가 휴식시간 대화 중에 화양서원 전교님을 대단히 화나시게 한 적이 있다.

"고구려의 기백이 지금까지 이어졌다면 우리나라는 일본보다 훨씬 앞서 선진국이 되었을 것입니다. 성리학으로 인해 조선의 500년은 양반의 나라였지 백성의 나라가 아니었어요. 결국 나라는 일본에 넘겼잖아요"했더니 버럭 화가 나신 전교님께서 "뭔 소리여! 양반이 나라 살려 놓고 양반이 나라 맨등겨!"하셨다. 더 이상의 논쟁을 막기 위해 진행하시는 분이 서둘러 다음 프로그램을 위해 집합을 하셨다.

저녁에는 이 행사의 주관이신 교수님께 슬그머니 같은 말을 꺼냈더니 "성리학이 학문적으로 최고임엔 틀림없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모순된 점이 있군요"하셨다. 일본이 조선을 쉽게 점령할 수 있었고 여유롭게 식민정치를 할 수 있었던 원인이 바로 500년 동안 백성들이 굽실거리기를 배우고 익혀 온 탓이다. 백성들은 자아가 없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겨 양반이지만 천민을 위해 나선 양반 강상호님의 형평운동을 오늘은 주제로 해본다.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는 천민들과 그 가족들이 등장해서 주요 역할을 한다. 그리고 '형평사' 이야기도 나온다. 조선시대부터 도살을 업으로 삼은 자들과 버들가지로 수공업을 하는 사람에게 백정이라고 칭했다는 기록이다. 갑오개혁은 문벌제도와 반상차별 등의 신분제 철폐, 죄인 연좌법 폐지, 조혼 금지 및 과부재가 허용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수백 년간 지속되어온 봉건적 관습이 적어도 법률적으로는 완전히 폐기 된 셈이다. 하지만 그것은 종이에 새긴 기록일 뿐, 백정들은 비단옷을 입을 수 없었으며 외출할 때는 상투를 틀지 못하고 '패랭이'를 써야 했고 기와집에서 살지 못했단다. 장례 때는 상여도 사용할 수 없었다. 또한 학교에도 받아 주지 않았다. 더욱이 일제는 조선의 개화를 방해하기 위해 봉건적 질서를 더 부추기는 입장이라 행정적으로도 차별을 심하게 했다.

예를 들면 민적(民籍)에 올릴 때 이름 앞에 '붉은 점' 등으로 표시하거나 도한(屠漢)으로 기재했을 뿐만 아니라 관공서에 제출하는 서류에도 반드시 신분을 표시하도록 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불만은 조직적인 사회운동으로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유독 진주에서 형평운동이 일어난 것은 양반 출신 강상호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도 백정의 자식이라 입학을 못하는 아이들을 서류상 양자로 입양해 입학을 시키기 시작해서 많은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게 해 주었단다. 그로인해 그분은 양반사회의 따돌림을 받는가 하면 신백정이라는 별명까지 붙어 다녔다. 허나 그분은 개의치 않고 형평운동을 한다.

후에 신백정 별명이 붙은 그분의 임종에 문상객이 없자 전국의 백정 즉 축산업주들이 모여 아주 성대한 9일장을 치렀다는 기록이다. 그 일로 인해 형평운동이 확산된 것이고 현 축산업조합이 형성 되었다고 한다. 단순한 운동이 아니다 조상 대대로 전해지는 한(恨) 덩어리가 폭발하는 것이다.

오늘 날은 어떤가. 강자 앞에서면 두 손 비비고 내 주장이 약한 민족성이 남아있다. 눈사람을 만들기 위해 눈을 뭉쳐서 굴리면 점점 단단하게 커지는 눈덩이처럼 너무나도 단단하게 세뇌된 조직적인 세력은 이제 아무래도 깨부수거나 막을 자는 없는 것 같다.

오계자 수필가
오계자 수필가

말 안 듣는 자는 죄목 만들어 날개 꺾어버리면 되는 세상을 보니 우리나라가 제대로 된 민주국가와는 점점 멀어지는 것 같다.

자식들에게 조선시대처럼 적응하는 요령부터 가르칠 순 없고, 자기주장 확실하면 날개가 부러지니. 어찌하면 좋을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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