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조영의 수필가

비 그치고 나니 맹꽁이 소리가 먼저 들린다. 오랜 폭우에 잘 견디어준 맹꽁이가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야속하다. 맹꽁이가 울면 비가 온다는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린다. 비를 예견하는 동물들의 움직임이나 자연의 변화가 맹꽁이 소리만은 아니겠지만, 무섭도록 내리는 비가 그만 왔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보니 애꿎은 탓을 맹꽁이 소리로 돌려보는 거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맹꽁이 소리는 고맙고 정겨웠다. 잠들지 않는 도시 밤, 쉼 없이 달리기만 하는 사람들에게 쉬어가는 듯 느린 단음으로 다가오는 반가운 소리였다. 맹꽁이는 '맹'과 '꽁'소리를 각각 낸다. 귀 기울여 들으면 구분되지만 소리에 취하면 분별은 의미 없다. 개발지역의 얼마 되지 않는 땅에서 굳건히 살아가는 맹꽁이가 그저 대견하고 안쓰러울 뿐이다. 끊일 듯 이어지는 애잔한 맹꽁이 소리를 따라해 본다.

오랜 장마는 학교 운동장에 풀도 무성히 키웠다. 코로나19로 학생들이 등교를 못해 밟지 않은 운동장, 등교 후도 운동장 활동을 못 하게 되자 흙은 부드러워졌고 그 틈 사이로 풀이 나와 자리 잡았다.

처음 몇 군데 올라온 풀을 볼 때만 해도 대수롭지 않았다. 코로나19가 종식되면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뛰어놀 것이라 기다리며 틈틈이 뽑기도 하고 롤러로 눌러도 봤다. 뿌리의 힘은 위력으로 누르지 못했다. 장마의 습기로 풀은 더 강해졌고 운동장은 기능을 잃었다. 가장자리에서부터 초록빛이 짙어지더니 지금은 전체를 덮었다. 운동장이라 생각하지 않고 바라보면 한적한 들판의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예초기 소리가 요란하다. 비가 그친 잠깐의 시간, 날카로운 쇳소리가 운동장을 덮는다. 풀도 작고 땅에 맞붙어 자라는 풀이 많아 예초기 칼날로 제거하기란 쉽지 않다. 풀과의 전쟁, 운동장에서 겪게 될 줄이야. 예초기 소리가 힘겨워 보인다.

예전처럼 아이들이 뛰어놀았다면 풀씨는 단단한 땅속에 묻혀있었을 것이다. 내 자리가 아닌 것을 풀씨도 안다. 존재를 드러낼 수 없는 암흑의 침묵, 그러나 올해는 코로나19가 숨을 불어 넣어주었다. 그래서 당당하게 보란 듯, 애초 여기가 내 터전이었다는 듯 빠르게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뛰어놀기 안전하고 고요한 운동장이 지금은 풀이 자라는데 가장 좋은 환경이 되었다.

조영의 수필가
조영의 수필가

자연의 회복은 반가운 일이다. 흙이 건강하다는 신호다. 그러나 운동장은 풀과 공존할 수 없다. 작은 생명을 품어주며 더불어 살아가는 풀을 생각하면 소중하지만 아이들 활동이 먼저다. 잠시 비움의 공간을 거침없이 채워가는 운동장 풀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나.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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