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칼럼] 안창호 충북스타트업협회 의장

코로나19 이후 생존방식은 180도 달라졌다. 가계(노동자), 기업, 정부, 비정부기구 할 것 없이 경제주체들은 이제 '지속가능' 혹은 '성장'을 논하기에 앞서 '생존'을 말하게 됐다. 바야흐로 코로나 발 '생존을 위한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우리는 최소 12~16개월 동안은 경기 침체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지속시간이나 파급력의 크기로 볼 때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보다도 큰 고통이 예상된다.

우리나라와 달리 초기방역에 실패한 나라의 기업 및 노동자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더욱 숨가쁘다. 아직도 해외 기업의 상당수는 재택근무를 유지하고 있는데, 코로나19로 인한 급속한 실적 악화는 두 번 째 문제가 됐다. 업무의 생산성을 따지기 전에 '생존'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하기 때문이다. 이미 올 가을 2차 대유행 앞두고 많은 기업들은 사람이 필요없는 비대면 중심의 '고객 데이터 알고리즘', 'IT 솔루션 재정비' 등 위기관리 시스템을 가동하고 있다.

가계, 즉 노동자는 더욱 절박하다. 어느새 지방 소도시의 골목상권까지 진입한 이른바 '터치 스크린 정보전달 시스템'이라는 키오스크(Kiosk)는 한 사람의 일자리를 빼앗아 갔다. 지난시절 자본가의 이익증대를 위한 '선택'이었다면 이제는 생존을 위한 '필수요건'이자 혁신의 '상징'으로 포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노동자의 '생존방식'앞 날에는 안개가 자욱하다. 오히려 노동의 질(質)에 따라 등급과 순위는 더욱 가혹하게 매겨지고 있다. 이번에도 가장먼저 벼랑 끝에 선 이들은 우리사회에서 가장 힘없고, 돈 없고, 빽도 없는 사람들이 됐다.

역설적이게도 매우 안정돼 보이는 사회에서 '계층의 이동 사다리'는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는다. 겉으로 평화로운 세상처럼 보이지만 실은 낙인효과(Stigma effect)가 되어 계층 이동을 허용하지 않는다. 또한 그 세상의 사람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아직 냄비 속의 물 온도가 개구리에게는 버틸만한 정도 고통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지금도 '만져서도 안되는' 천민이 수 억 명 넘게 존재하며, 비리로 얼룩진 정치세력이 나름의 방식으로 장기집권을 해도 끄떡없다. 올라갈 곳은 보이나 결코 올라갈 수 없는 '유리천장(glass ceiling)'이 만성화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이다. 코로나19와 같은 재난시대에 '계층의 이동 사다리'는 아예 사라질 수도 있다. 이제는 '기업이 살아야 경제가 산다'는 구호아래 잊혀졌던 기업 안의 노동자를 돌이켜봐야 한다. 기업이 살면, 주주만 행복해 지는 현실에서 노동자의 이동 사다리는 생존경영이라는 슬로건이 당연시 되고 있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노동자의 의견이 '낮은 목소리'일 수밖에 없다면 낮은 목소리라도 여러 명이 외쳐야 한다.

"위기는 그것이 위기인지 모르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진짜 위기는 "위기인지 알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이번 감염병으로 인한 노동자의 위기에 다행히 이번에도 국가가 나섰다. 여행, 관광 등 특별업종이지만 고용유지지원금이 기존 180일에서 240일로 연장하기로 한 정부방침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더 이상 간절히 바라는 마음만으로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어느 해협을 헤엄쳐 횡단하는 선수가 있었다. 종착지를 앞두고 포기한 그를 두고 많은 사람들은 중도 포기 이유를 이렇게 생각했다. '물이 얼마나 차가우면 포기했을까?', '거센 파도에 포기 할 법도 하지.'

하지만 고개 떨군 그의 말은 이외로 간단했다. "제가 포기한 이유는 차가운 바닷물도 아니고, 거센 파도도 아니었어요. 제가 포기한 이유는 안개였습니다. 지금의 고통이 언제까지 인지? 어디까지 계속 될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안창호 충북스타트업협회 의장
안창호 충북스타트업협회 의장

'계층의 이동 사다리'는 평온한 시대에는 비열한 권력에 걷어 차인체로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가, 사회가 급변하게 되면 '희망'이 된다. 아쉽게도 '희망'은 누군가에게는 '희망의 기회'가 되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희망의 고문'이 된다. 지금 우리에게 계층이동 사다리는 희망이라는 이름의 '기회'인가? 아니면 '고문'인가? 그도 아니면 '남의 이야기' 인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바라기만 하는 꿈은 잠속에서나 이룰 수 있는 꿈일 수밖에 없다. 쟁취하는 '행복'이야말로 살아있는 '계층의 이동 사다리'다. 그렇다고 나만의 행복을 위한 쟁취가 고상하고 거창할 필요는 없다. 행복하고 싶다는 솔직한 욕망으로부터 행동하는 내 삶의 작은 도전, 연대, 협동이 시작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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