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경영 수필가

눈 감으면 그리운 양지 뜰 내 고향은 검은돌이 많이 나오는 동네 햇살 가득한 골목 끝집이다.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겪으며 배고픔의 설움으로 먹기 위해 살았을 고달픈 인생길 걸어오신 부모님. 격변의 이데올로기 시대 공주사범학교를 나와 공부에 욕심이 많았던 고모가 소련유학의 꿈을 안고 월북했다. 할머니를 비롯 남은 식구들은 졸지에 빨갱이가족으로 오인받아 고향을 떠나 야반도주 할 수밖에 없었다. 직장을 잃고 서울로 올라온 아버지는 닥치는 대로 일하며 암울했던 시대의 희생양으로 고단하고 힘겨운 삶을 사셨다.

호구지책으로 시장에서 장사하시던 그 시절. 어린 눈으로 바라 본 밥 배달 아주머니의 쟁반탑 묘기대행진은 놀라움이었다. 똬리 튼 머리 위에 꽃그림이 그려진 양은쟁반 3~5층짜리 배달밥상. 춤추듯 무너질 듯 좁은 시장 골목길을 아슬아슬하게 걸어가는 움직이는 밥상. 한 층씩 헐어서 김이 모락모락나는 배달 밥을 먹으며 허기를 채우던 시장 사람들 모습은 그대로 그림이다. 밥쟁반을 머리에 이고 천천히 조심스레 달리는 부지런한 삶의 걸음이다. 전화만 하면 십 분 내로 달려오는 배달의 기수 오토바이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은가. 우리 민족을 가리키는 역사상 최초의 이름 배달민족(倍達民族). 그러나 지금은 24시간 배달이 가능한 우리 문화를 가리켜 배달민족(配達民族)이라하니 같은 이름 다른 문화가 참으로 아이러니컬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틈 없이 일하시던 부모님께서 드디어 우리 가족의 본적지가 된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셨다. 방과 방을 이어주는 대청마루와 조그만 마당이 있는 집에서 기뻐하시던 젊은 엄마 아빠의 모습이 기억에 또렷하다. 후에는 친인척들의 서울행이면 으레 숙박 하는 집. 어려운 사람들이 세들어 살다 집을 사서 나가는 정거장 같은 집. 가까이 대학교가 있어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많은 오빠들이 거쳐 간 하숙집이기도 했다. 부모님의 일터. 학교와 교회 트라이앵글 공간을 벗어나지 못했던 나의 유년기. 바쁘다는 이유로 교회교육에 자녀들을 맡긴 지혜로운 엄마덕분에 사남매는 상처없이 정서적으로 잘 자랄 수 있었다. 그러나 엄마는 어릴 적 우리를 잘 먹이고 잘 입혀 주지 못 한 것이 마음 아프고 미안하다 종종 말씀하신다. 키워주시고, 가르쳐주신 은혜만으로도 감사인데, 부모마음은 주고 또 주어도 못 해 준 것만 생각나는 가 보다.

어느 해 겨울 동생과 함께 우리의 어린 시절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고향 집을 찾아 추억의 보물찾기를 했다. 잰걸음으로 한참을 걸어 시장에 갔고, 또 한참을 걸어 학교를 갔고, 또 한참을 걸어갔던 교회가 이렇게 가까운 거리 일 줄이야. 우리가 살던 집은 문패가 바뀐 커다란 3층 다세대 주택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이경영 수필가<br>
이경영 수필가

다방구. 공기놀이. 고무줄하며 뛰어놀던 친구들과 가족들... 어린 시절 그대로의 모습으로 유년의 뜨락에 잠시 머물렀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도 마음속에 새겨진 어린 날의 초상(肖像)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돈이 많은 사람보다 추억이 많은 사람이 더 부자라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우리 사는 모든 순간들이 기적이고 행복이기에 감동과 아름다움을 나눌 따듯한 마음 가진 사람들과 만나고 싶다.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함께 나눌 그들을 더욱 사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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