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모임득 수필가

백로(白露)를 지나니 아침저녁으로 선선하다. 장맛비와 폭염에 시달리다 며칠 사이 서늘해진 바람을 보며 계절은 속일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초록빛이던 나뭇잎도 살짝 빛을 거두어들이고 담장 위 호박도 열매를 더 많이 맺을 채비를 한다. 선선한 바람에 잎사귀도 누른빛으로 살짝 물들었다.

봄이면 어머니는 밭 가장자리나 집 주위 울타리에 구덩이를 파고 퇴비를 넣어 호박씨를 심으셨다. 호박은 발아가 잘 되는 작물 중 하나인데, 싹은 떡잎부터 나온다. 넝쿨은 나뭇가지 더미, 울타리, 지붕 가리지 않고 뻗어 나가 호박잎으로 덮였다.

호박꽃 필 때면 벌들이 꽃에 윙윙거리며 들락거려도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 열매를 맺어 된장찌개에 넣거나 국수 고명으로 쓰임새 다양하게 밥상에 올랐다. 난 수제비 끓일 때 호박을 반달모양으로 썰어 넣기도 했다.

비가 내리는 날, 담벼락 애호박을 따다가 부침개를 부쳐 먹으면 맛이 좋았다. 호박 넝쿨로 친친 덮인 담장 위로 부침개가 이웃집으로 넘나들던 시절. 비 오는 날 퍼져나가는 기름 냄새는 오감을 자극한다.

어릴 적 추억은 감흥을 불러온다. 아침 이슬을 머금고 함초롬히 피어 있던 호박꽃. 선머슴처럼 들로 산으로 다니던 산골 처녀 모습이다. 시골에서 자라서인지 잊히지 않는 정서는, 나이가 들면서 혈관을 타고 면면히 흘러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비가 내리거나 날씨가 끄물거리면 다친 지 오래된 팔꿈치가 스멀스멀 아파진다, 목덜미도 딱딱해지는 것 같고. 그러면 혈압으로 쓰러져 반신불수로 고생하신 아버지가 생각나 경락을 받곤 한다. 중풍이 친정 가족력이라서 혈관 관리를 하려고 노력 중인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태풍이 지나가면서 비가 세차게 내린다. 경락집 원장은 비 오는 날이면 호박 줄기를 세워 놓고 물이 줄기로 빠져나가게 하는 소꿉놀이를 즐겼단다. 굳은 목덜미를 누르며 치료하는 것 또한 호박 줄기에 막힘없이 물이 흐르게 하는 이치랑 같다는 생각이 든다. 혈관에 찌꺼기가 없이 흘러야 뇌출혈이나 동맥경화 같은 병을 예방할 수 있지 않은가. 혈액이 온 몸을 원활하게 순환하려면 혈관이 깨끗해야 한다.

평생 농사짓는 일밖에 모르던 아버지는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쓰러지셨다. 발견만 일찍 했어도 좋아졌을 텐데, 오른쪽을 못 쓰게 되셨다. 지팡이에 의지한 채 절룩거리며 6년을 사시다 다시 쓰러지셨다.

연둣빛 애호박에서 초록빛으로, 누렇게 익어가는 호박. 늙은 호박 속을 파 보면 혈관 같은 끈으로 씨앗을 끈끈하게 잡고 있다. 생을 다하면서 종자를 퍼트리기 위한 생명력일 테다.

모임득 수필가
모임득 수필가

꽃과 잎, 애호박, 늙은 호박, 가을볕에 썰어 말린 오가리로 사계절 먹을거리를 주는 호박. 그렇다고 대접받지도 못하고 값도 싸서 아무 때고 식탁에 올리는 만만한 반찬이다. 모나지 않고 둥글어 원만한 성격인 아버지 같다.

마지막 더위가 한창이다. 이 햇귀에 벼 이삭은 여물고 과일은 단물을 채울 테다. 머잖아 아낙네 궁둥이만한 호박덩이가 깊은 맛을 담고 암팡지게 앉아 뒹굴고 있겠지. 내 인생도 초록빛을 지나 누렇게 익어가는 중이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